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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Dec 23. 2019

경영 기록

첫 번째 전투

호기롭게 ‘프로 리그’에 뛰어들었다. 2018년 3월이었으니 보름쯤 지나면 회수로 3년 차다. 평생 ‘실전 트레이닝’을 가르치며 살았다. 그동안 배운 많은 것들을 필드에서 실현해보겠다는 부푼 꿈이 있었다. “트레이너가 갑자기 웬 감독인가?”라는 의문도 있었지만,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분석한 바에 의하면 이전 감독의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만이 문제였다. 꽉 막힌 혈관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듯 미지급된 선수들 급여를 지급하고 낡은 운동장을 손보면 다시 40년 전통의 팀으로 우뚝 솟을 거라 믿었다. 수혈이 끝났고 안팎으로 정비를 마무리했다. 다시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꽤나 큰 스폰서 계약도 맺었다.


불행히도 같은 해 9월 리그 자격 박탈이란 판정을 받았다. 협회 자격 심사가 있던 날 위원으로 참여한 이의 첫 번째 질문은 “왜 이 팀의 경영개선에 들어왔습니까?”였다. 경영개선 기간이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왜 이런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었냐는 말이었지만 의심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머리 뒤에 커다란 말풍선이 보였다. ‘부정행위를 일삼던 이전 감독이랑 짝짜꿍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판에 뛰어들었겠어?’ 이런 의심은 비단 협회만의 것이 아니었다. 팀 내의 선수들 중에도 무리를 지어 신임 감독 및 운영진을 비난하는 집단이 있었다. 전통의 강호를 재정비해 리그 정상 팀으로 부활시키겠다는 꿈은 멀어져 갔다. 천만다행으로 리그 자격 박탈은 유예됐고 다시 11개월의 팀 경영개선기간을 부여받았다. 워낙 드문 일이어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았고 다시 한번 꿈을 향해 일어나 달려보기로 했다.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감독 직에서 물러났고 운영진 이사 직으로 남아 마지막까지 돕기로 했다.


추가 경영개선기간 부여 이후 시장의 반응은 이전보다 훨씬 싸늘해졌다. 팀의 지원을 위한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당장 리그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진 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팀을 응원하겠다던 굴지의 스폰서와 체결된 계약을 통해 금융기관에서 운영자금을 지원받기로 했다. 기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스폰서 측의 신탁 동의서만이 필요했다. 간절히 부탁했지만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됐다.


리그에 속하지 못하다 보니 ‘프로’라는 이름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중소 아마추어 팀을 지원하는 국가 기관에서는 개선기간이 완료되고 완전히 자격이 박탈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규정이 그렇다 보니 더 요청할 수 없었다. 팀의 미래와 감독 및 운영진을 믿고 도와주겠다던 초지인들은 갑자기 연락이 끊기거나 난색을 표했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들을 비난할 순 없었다.


더 이상의 자금 수혈이 어려워 이사진 들의 사비를 털어 가수금을 넣었다. 업계의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가수금을 넣는 경우는 처음 본다 했다. 바보 같다고 했다. 그렇게 월 5억에 달하는 선수들의 임금을 겨우 지급했다. 몇 개월이 지나 이마저 바닥나고 올해 3월부터는 임금 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전기세 등 세금이 미납되어 운동장을 사용할 수 없어졌다. 선수들은 하나 둘 떠났다. 텅 빈 운동장에 운영진 일부와 우리를 비난하던 무리만 남았다.


지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경영진 교체 후 한 차례의 훈련도 참여하지 않고, 있지도 않은 감독 및 운영진 비리에 대해 시위를 일삼던 무리가 1,2월 급여문제로 검찰에 경영진을 고소했다. 자금이 부족해 우선 급여 먼저 지불하고 4대 보험을 미쳐 납입하지 못했다. 경영진이 보험료를 횡령했다는 내용의 소장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덕분에 신임 감독은 검찰 조사를 다녀왔다. 결과는 당연히 ‘무혐의’였다. 백 원 한 푼 횡령한 사실이 없음이 오히려 명백히 증명됐지만 검찰 조사를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 일이다. 검찰, 경찰, 고용노동부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사 차선 도로가 나오면 본능적으로 좌회전하는 삶을 살아왔다. 집 앞 현대, 기아차가 있는 사거리에 시위가 있을 때 교통 체증을 불평하는 사람들, 귀족 노조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이 절실한 대한민국의 후진 노동 현실에 대해 일갈해왔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그 클리셰에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7월쯤 협회에 들어가 전후 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운동장은 멈춰있고 선수들은 떠났다. 지금 상황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협회는 더 이상 신 경영진이 팀을 악의적으로 사고파는 소위 ‘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 팀을 살려보라는 비공식적인 허가를 받았다. 운동장을 돌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보기로 했다. 축구든 야구든 미식축구든.


11월 마지막 평가를 앞두고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팀에 50억 정도의 운영자금을 지원하고 150억 정도는 신규 야구팀을 신설하자는 내용이었다.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이 팀은 축구팀인가, 야구팀인가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골머리를 앓는 동안 더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200억 규모의 자금을 바로 만들 수 있는 사업권을 우리 팀을 위해 넘겨주겠다는 투자자가 나타났다. 심지어 이 분은 마지막 협회와 미팅에 동석해 본인의 투자의지를 정확히 서류상으로 밝혀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 미팅이 시작됐다. 경영개선기간 동안 노력한 부분에 대해 토로했다. 경영진의 부족한 재력, 부족한 리더십 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단, 우리 팀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와 향후 리그에서의 역할에 대해 공감을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협회는 동행한 투자자에게 질문했다.


“왜 이런 위험한 투자를 감행하시는 건가요?”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사업하겠다고 물불 안 가리고 뛰어다니는데 옛날 생각이 납디다. 나도 사업에 실패해 긴 시간 고생했던 기억이 있소. 더구나 축구팀은 한때 나 역시 참여해본 적이 있는 사업분야라 관심이 많소. 협회에서 리그에 복귀시켜주기만 하면 이 팀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미팅을 마치고 5시쯤 협회 관계자에게 연락이 왔다. 최종적으로 리그에 탈락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쉽고 죄송하다고 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리그 박탈 무효 가처분 소송을 냈다. 소송은 진행 중이다.


코스닥 상장사의 대표 이사가 되고 많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사장 놀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총에 맞을지 포탄에 날아갈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중 가장 괴로운 것은 아이에 대한 공격이었다. 철없는 아빠가 SNS에 너무 많은 기록을 남겼던 터라 반 공인이 된 이후, 다양한 인신공격을 받았다. 견디기 힘들었다.
또 다른 삶의 희비를 겪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값진 내공이지만 이로 인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작년 말부터는 임원진이 솔선수범해 급여를 삭감했다. 그마저도 올 3월부터 끊겼다. 경제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아무 부족함 없이 살던 삶이 급변했을 때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아낌없이 도와주고 기다려준 분들 덕분에 연명하고 버텼다. 나를 아끼는 많은 이들이 제발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으라 했다. 실제로 많은 제안이 있었다. 올해 안에 회사 상황이 상당 부분 정리되기 때문에 내년에 합류하기로 했다.
아마도 이전의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다. 지옥 불을 헤쳐나가며 그 고통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즐기고 있는 생소한 나를 발견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해도 남겨질 수많은 글감들을,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더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장으로 돌아가자. 또 하루를 버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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