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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쥰 Jan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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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자, 버티는 거야, 버티고 보는 거야

 졸업 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학부 시절 몸담았던 글쓰기 모임 '써글'에서 해마다 후배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 예정이니, 함께 문집에 실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을 써서 보내달라는 메일이다.


이번 주제는 "써글 이후의 공간"이었고,  오랜만에 글을 적어보자는 이유가 생기니 설레기 시작했다. 후배에게 보낸 글을 가져와 브런치에 기록해 본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졸업 후 가장 체감하는 삶의 변화는 ‘공간’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바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내가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써글 이후의 공간은 찬란하고 멋진 삶의 공간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극, 이 또한 재밌는 삶의 과정이라고 힌트를 살짝 추가하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첫 직장, 모 광고 대행사에서의 기억은 매웠다. 대행사이다 보니 갑 회사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내가 속한 팀은 속수무책으로 새벽 퇴근을 일삼았다.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갈 때에는 택시 기사님 몰래 눈물 콧물 흘리며 오늘 일한 시간을 메모장에 눌러 적었다. 새벽 3시에 퇴근을 했으니 16시간 정도. 집이란 공간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으로의 역할만 했을 뿐이었다.


호주 워홀 당시의 필름 기록

 그렇게 1년을 채 버티지 못한 채 호주 멜버른으로 워홀을 택했다. 3인 1실이 보통인 셰어하우스에서 숙면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어 귀마개와 안대를 끼고 살았지만,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살다 보니 다시 어딘가에 속해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외국에서 워홀러는 '정착'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개발에 발을 들이게 되고 개발자로 이직 후, 아직 낯설지만 대리로 첫 진급까지. 서울이라는 공간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는 아직 1년이 채 안 되었다.


 나만의 공간이 처음 생기고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방 안을 꽉꽉 채워갔다. 내가 좋아하는 색을 가진 노란 테이블 의자, 자개 장식이 멋스러운 검은 통기타, 크고 투박하지만 레트로한 LP 플레이어, 서프보드 모양 인센스 홀더에 얼룩무늬 베개까지.


 들뜬 마음에 친구들을 매일같이 초대했다. 손수 고른 플레이리스트를 잔잔하게 깔아주는 정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해준다고 유튜브를 몇 번이나 돌려보며 음식을 대접하는 등 소중한 나만의 공간을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만끽했다.

 딱 이번 겨울이 오기 전까지.

 

 서울에서의 겨울은 작년에 비해 더 추웠는데, 모두가 들뜬 크리스마스 주간에는 유독 더 그랬다.


 나는 수도가 꽁꽁 얼어 세숫물조차 나오지 않는 내 작은 자취방을 차마 떠나버리지 못하고 끙끙 앓듯이 몸을 둥글게 말아 버텼다. 가족과 학교라는 원을 벗어나니 내 작은 공간을 지킬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면서 오기도 생겼기 때문에. 난 잘 지내고 있어, 모두가 걱정하지 않을 만큼 1인분을 해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하는 약간의 자존심도 있었겠다.


 최근 유행했던 한 밈(meme)처럼 '버티자, 버티는 거야, 버티고 보는 거야~'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치며, 수도가 고쳐질 때까지 일어나자마자 헬스장으로 직행하여 씻고, 집에선 생수를 사서 급한 양치를 해결했다. 불쌍하게 보인다고? 생수로 양치해 보는 호사스러운 경험 덕분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이것도 이렇게 글로 써 내려가고 있자니 하나의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홀로서기. 참 쉽지 않지만 그래서 재밌다.


 그런 의미에서 써글은 나에게 있어서 '모닥불' 같았다. 일본언어문화학과에서 문화콘텐츠학과로 전과한 뒤, 가끔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맞나-라는 소속감에 대한 의문이 들 때마다 마음 맞는 선후배들과 섞여 앉아본다. 그럼, 마치 추운 겨울 오밀조밀 붙어 앉아, 모닥불이 온기를 내듯 대화로 그 공간을 덥히는 모습인 것만 같았다. 구태여 말로는 하지 않았어도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 너 여기 있는 거 맞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따뜻했던 공간. 그래서 난 써글 모임이 참 좋았다.


 나의 써글 이후의 써글 후배들에게 써글은 어떤 공간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모두 각자의 따뜻한 삶의 공간에서 안녕한지 궁금하다. 그곳이 어디든 그 어떤 공간보다 따뜻하기를, 일찍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들에게도 서로만큼은 따뜻하기를 바란다.


+ 변명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새로운 분야로 전직하고 나니 글을 쓸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사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 후배들의 이런 메일이 참 반갑고 고마웠다.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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