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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쥰 Oct 28. 2015

너 출발했니?

  나는 길치다. 내가 길치란 걸 처음 알았을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원에 가느라 생애 처음으로 마을버스가 아닌 복잡한 서울 버스를 타야 했는데, 엄마는 그런 내가 걱정됐는지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목적지에서 내려달라고 미리 말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매우 소심했던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고 불안한 마음에 버스 기사 아저씨 바로 뒷자리에 자리 잡았다. 두근대는 마음을 끌어안고 약 1시간 반이 지났을까? 버스는 점점 한적한 곳으로 다다르기 시작했고, 주변엔 산까지 보였다.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린 곳은 종착역이었다. 역시나 아저씨가 내 모기만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핸드폰도 없던 당시의 나는, 학원에 가지 못해서 엄마에게 드는 죄의식과 집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막막함뿐이었다. 심지어 돈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훌쩍이다보니 산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부부가 5천원을 쥐어주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저 부부는 왜 이렇게 쉽게 돈을 주시나 잠시 쓸데없는 남 걱정도 해봤지만, 나는 어떡하든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더 이상 버스를 잘 못 타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내 맘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길치들은 내 마음을 잘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이 좋아져서 지도 어플리케이션 덕분에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요즘에도 종종 지하철이나 버스를 잘 못 타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깨달았지만, 내 문제는 태생적인 길치뿐만 아니라 덜렁대는 성격도 한 몫을 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최악이었던 것은 2015년 8월 29일의 일이었다.


  "너 출발했니?"


  친구네 집에서 발 닦고 잘 쉬고 있는데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아직 집에 가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왜 이리 닦달인지. 내일 출발한다고 답장을 하고 다시 누웠는데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급하게 노트북을 켜 ‘티켓들’ 폴더를 열어 티켓을 확인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이미 비행기 출발 시간이 6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하하. 시트콤에서 많이 보던 상황이었는데, 막상 내게 일어나니 담담하고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친구가 얼굴이 하얘진 채 오히려 더 난리였다. 엄마가 이 글을 보면 또 한 소리 하겠지만 어차피 놓친 거 차라리 늦게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일찍 알았으면 마음이 불편한 채로 놀았을 테니깐 말이다. 이미 지난 일인데 어떡하겠는가, 일단 자고 보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엄청난 패닉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비행기를 놓친 건 내 잘 못이니 다음 비행기를 타려면 돈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아깝지만 20만원 정도 낸다는 글을 보았기에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 기다리는데 20만원은 무슨, 130만원이란다. 종착역까지 갔었던 어린 날처럼 내가 결국 이렇지 하는 마음에 눈물 맺혔다. 그러나 그 다음날 비행기는 60만원 정도라는 희망적인 말을 들었고, 그렇게 나의 공항 노숙은 시작되었다.


공항에 혼자 남아 사람구경

  혼자는 괴로웠다. 넓은 공항에 곧 있을 여행에 대한 생각으로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과 연인들, 그리고 혼자 남은 나, 마치 나 혼자 흑백처리된 것 같았다. 혼자 놀기에 자신이 있었지만 3시간 만에 질려버렸다. 앞으로 12시간이나 남았는데 엉덩이는 아프고 화장실가려면 온 짐을 다 끌고 이동하던가, 내 짐을 들고 도망가지 않을 것 같은 옆자리의 외국인들에게 맡겨야 했다. 새벽은 공항에서 쫓겨나 추운 공항 게이트 앞 의자에서 비치 타올을 덮고 쪽잠을 자기도 했다. 머리는 못 감은지 36시간이나 흘러 모자를 벗을 수도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국에 도착해 배웅하러 언니가 나왔다. 뭐라 말할 면목이 없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했다.


  그렇지만 그 날 이후로는 정말 확실하게 깨달았다. 여태 누군가에게 의지만 해왔던 나였기에 이 날의 교훈은 정말로 날 크게 바꾸어 놓을 정도로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말한다. 우리 가족들은 이 사건을 두고 평생을 놀려먹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으로만 생각한다.


  60만원 짜리 교훈을 샀으니까 괜찮다. 나는 괜찮다. 정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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