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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 소방관 심바 씨 Jun 13. 2023

MZ세대의 건배사

인월센터로 발령을 받고 처음으로 회식자리를 가진 날이었다. 사복으로 치장을 하고 고깃집에 모인 팀원들을 보자니 딱 봐도 군인, 경찰, 소방 중 한 무리로 보였다. 왜 그런 건지 이 집단은 3명 이상 모이면 이상하게 티가 난다. 패션의 문제는 아닌데 가만 보면 패션도 문제다. 대체적으로 복장 색상이 어둡거나 조금 어둡거나 매우 어둡다. 게다가 저 태극기 박힌 사막색깔 배낭은 도대체 어디 가면 나눠주는 건가. 암튼 오늘도 어두운 무리는 모여서 곧 불판에 올라갈 단백질을 기대하며 시끌벅적 대고 있었다.


“자! 먹는 것은 알아서들 먹고, 한 명씩 돌아가며 건배사나 허자.” 센터장님께서 잔을 들고 말씀하셨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들 밥 먹다 명치를 맞은 듯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처세를 이어나갔다. 공무원 행정의 꽃이라고 불리는 '복사ㆍ붙여 넣기'가 있으니까. 앞사람이 사용한 좋은 표현과 어휘들은 곧 내 건배사의 양분이 되어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었다. 윗 계급 순으로 건배사를 외쳤고, 마지막 MZ세대 직원의 차례가 되었다.


"잔을 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팀에서 가장 젊은 직원이 박력 있게 건배사를 이어갔다.


"제가 훌륭하신 선배님들과 함께 생활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말도 잘하는 막내였다. 기특해.


"저희 신규직원들도 선배님들 같은 소방관이 될 수 있도록 제가 선창 하면 다 같이 후창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와 눈을 한번 마주치고 하늘을 향해 잔을 뻗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 읭?!.. 하마터면 따라 외칠 뻔했다.


모두들 의식의 흐름대로 후창을 따라가다 중간에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이 고급 낚시 기술은 뭐지.? 다들 맥주잔만 높이 든 채 리액션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 역시 MZ세대!! 허허허허” 라는 말이 들렸고 이내 웃음꽃이 터지면서 박장대소로 이어졌다. 막내직원도 손사래를 치며 본인이 의도한 건 이런 게 아니라며 식은땀을 흘리며 설명을 붙였지만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유야 어쨌거나 관공서 건배사치곤 과감하고 신선했음은 틀림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막내직원은 신인류의 아이콘이 되었다. 사실 워낙 싹싹하고 나무 날 데가 없긴 한데 가끔 관행으로 물든 우리에게 ‘읭?’ 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역시 MZ세대!’라며 웃어넘기곤 했다.


소방공무원 인원 확충이라는 순풍을 타고 대거 입사한 MZ세대를 이해하고자 ‘리버스 멘토링’을 시행한 적이 있다. 리버스 멘토링은 조직의 임원이 멘티가 되고, 신입 직원들이 멘토가 되어 신문물을 임원들이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오전 내내 계획된 행사를 위해 각종 게임과 질문들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결국 서장님이 시원하게 속풀이 연설을 하고 커피를 탁 털고 가셨다. 좀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이게 더 편한 모습인걸. 막상 신입직원 멘토들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신세대를 완전히 받아들이기에 우리 소방서도 그들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세대교체의 큰 흐름이 된 MZ세대는 비단 서울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깜찍하고 조금 발칙할 것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심오했다. 합리주의적인 생각과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경향은 하급자의 희생이 당연하게 여겼던 고무적인 조직에 경종을 울렸음은 틀림이 없었다. 가끔 멈칫하게 만들더라도 순기능이 더 크다.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이들의 요구에 따라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난 우리 막내직원의 건배사가 끝까지 따라 외쳐지길 응원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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