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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Jan 16. 2022

단일한 해석으로 가두지 못하는 세계

공연 관람이 좋은 이유 1

11월의 마지막 밤은 비온 뒤 바람이 강했다.

공중에서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갈 길 몰라 방황하듯 보이기도 했고,

삭막한 도심길 사람들을 어루만지듯 위로하듯 다가오기도.

그 낙엽들이 내 속에 늘 그리운 공연들 같았다.

두근두근 한 계절을 보냈다.

일부 참여했던 공연를 본 이후의 후유증은 강한 편이다.

후유증이 부정적인 늬앙스를 풍기니

여운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공연 다음 날의 일상은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으나

현실보다는 악몽 같기도 했다.

자기 성질 못 이기는 조울의 사회적 동료 

연봉과 부동산, 주식 대화가 주요 소재인 사람들 곁에서

(물론 먹고 사는 중요한 얘기이지만) 

지나간 장면의 늬앙스와 느낌, 조합과 비조합의 구성,

처음 발견한, 못내 잊히지 않을 아우라와

클리세라도 다른 결로 표현해내는 기술

'나'를 드러내던 다른 사람 사이를 떠올렸다.

그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내겐 또 다른 생활이 필요하다.

보통의 섬으로 돌아말을 쉽고 거칠게 내뱉는 사람들

에서 태연한 듯 무던함으로 포장하고

또 하루를 난다.

공존이라기보다는 누가 적인지 벗인지 모를

현장에서 각개전투를 하는 것만 같은 모습으로.

사라진 공연을 지금의 에너지로 끌어  뿐이다.

그리고 내내 그렇게 살게 되겠지.

자조는 아니다.

어쩌면 너무 지극히 대조되는 환경이 존재하기에,

그 대비를 통해 삶에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더하는 것도 같다.

내겐 공연 관극이라는 유토피아가 있어서,

현실에 발 딛는 힘을 얻을 후 있으니깐 말이다.


어떤 대상이든 단일한 해석과 대응은 불편하다.

이래야 해, 라는 당위성을

자주 맞닥뜨리지만 그때마다 드는 것은

'왜?'라는 물음과 퀘스천 마크.

공연에 빠진 건 인간의 또다른 몸짓과 말로 인해

주변 환경 응당 하나의 세계

갇히지 않았던 까닭이다.

빈 무대에 소품과 빛과 음악 등이 들어오고

거기 사람이 존재하면,

어느새 서로 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

그 세계는 비루한 현실을 참게 하고

노곤한 일상에서 구출시키며

그러한 상호 간의 알 수 없는 믿음이,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에도

어딘가 있으리란 기대를 만든다.

어두운 공연을 보아도

시간이 흐르면 희망이 되고,

다방면으로 열릴 그 언젠가의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어쩌면 그 세상이 내게 오지 않을지라도.

상상의 힘으로도 살아낼 수 있게 설렘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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