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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Jan 03. 2022

불가사리의 자살

타의와 자의 사이 어딘가

불가사리는 다리가 잘려도 다시 자랄 수 있단 사실을,

공연을 보고 알게 됐다.

<불가사리의 자살>

연출 윤자영, 퍼포머 임은정, 조의진.

자기 번식이 가능한 생물,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어느 해변가 두드러진 불가사리의 떼죽음. 

작가에겐 어떤 착상을 주었던 걸까.

그 답은 알 수 없 테지만,

무대 위

불가사리가 서식하던 바닷가와 실험실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떼죽음으로 발견된 불가사리의

무덤 같은 무리 사진을 비춘 건 

독자에게 어떤 인상을 자발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자연에 의한 자연스러운 창작 발로

등으로 느껴졌다.


퍼포먼스가 시작되기 전, 이미 한 무용수는

바닥에 드러누워 숨도 쉬지 않 듯

지면에 딱 달라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후 그가 움직이고 있을 땐

사람으로 분한 불가사리의 분신 같았다.

파동이 일 때 정지하고 정지할 땐 파동을 일으킨다는

맥락의 술어를 비틀어 문장을 반복하는

어구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었는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으나 그게 와닿았다.

타의에 의한 것인지 의지에 의한 것인지

모호한 분위기를 내는 가운데,

그 문장이 핵심처럼 다가왔던 까닭이다.

불가사리의 자살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마치 타의에 의한 생태계 일부의 죽음을

그나마 생명의 의지를 불어넣어

역설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듯했고

그것이 무용수의 움직임과,

배우의 연기론과 연결되었다.

배우는 내가 이것을 하는 것이

하려는 의지보다 여기에 있으니 어떤 영향으로

인해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환경에 의한

작용을 짤막히 연기론으로 드러내었는데...

그게 우리가 생활하면서 고민하는 것들,

가령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스스로에 의한 것인지

딱 집어 말할 순 없으나 여기 있도록 만든,

어떤 주변의 작용 때문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일상에서 종종 부딪히는

존재 위치에 대한 고민들,

그런 것들을 퍼포먼스를 보면서

떠올려 보게끔 되었다.


불가사리 모형을 두고 잘라 보기도 하고

입에 대어 먹어보는 시도를 하는

배우의 모습들이

모두 일상의 소소한 고민들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고,

거울 보드를 들고 서핑을 타는 듯

흔들리나 굳건하고 단단해 뵈는 무용수의

포즈들은 모두,

고민이 있으나 살아내야 하는

일반적인 생의 의지 같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호기심 어린 배우와 담대한 무용수의 대조적 이미지가

무대에 어우러지면서

불가사리는 왜 떼죽음을 당했던 걸까

괜히 더 알고 싶어졌다.

생태계에 대한 극 같지만 결국 사람 얘기일 수도 있는

'불가사리의 자살'은

그래서 결국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고

잔혹한 이기에 대한 물음을

타살일 수밖에 없는 생태계 파괴에 대해,

그 자연의 대상들도

어쩌면 의지가 있었을, 죽음의 선택에

대해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했다.


삼일로 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나와

을지로 스타벅스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공연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날 시킨 쿠키 라떼의 쿠키가 불현듯

녹아 있었는데, 형체가 사라지는 모습조차

공연의 연장 같았다.

불가사리처럼 눈 앞에서 오묘하게 녹아 없어졌는데,

커피를 보면서도

자기 재생이 가능하나 사라진 불가사리를 생각했다.


게다가

그 매장은 빌딩 안에 좁은 복도를 막아 만들었는데,

밖을 보고 나란히 앉으니

열람실이나 다름 없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실 같은 풍경이

퍼포먼스 속 배우가

불가사리 실험을 하던 단독 장면 배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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