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7장. 사고 실험:

만약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에 실패했다면?

by 블루프린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실패라는 상상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 끝에 새로운 땅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안고 항해를 떠났다. 그런데 만약 그 항해가 실패로 끝났다면 유럽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대륙 발견”이라는 인류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해 본다. 그의 배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거나, 설령 돌아왔더라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유럽은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라는 이 질문은 단순한 역사 소설적 호기심이 아니라, 문명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사고 실험이다.

15세기 후반 유럽 사회를 뒤덮었던 내부의 거대한 압력이 신대륙이라는 “탈출구”를 만나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를 거꾸로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현재 시대, 특히 대한민국이 처한 문제의 본질을 통찰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한 세계, “신대륙 없는 유럽”의 대체 역사를 따라가며, “만약 신대륙이 없었다면, 유럽은 지금의 한국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15~16세기: 팽창하는 인구, 좁아지는 땅


콜럼버스가 떠나기 불과 몇십 년 전의 유럽은 이미 “압력솥”처럼 내부 압력이 치솟는 사회였다. 흑사병으로 한때 인구가 급감했던 유럽은 15세기에 들어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불과 한 세기 만에 인구가 폭증하면서, 한정된 경작지와 식량으로는 늘어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벅찬 상황이 되었다. 땅은 그대로인데 입이 크게 늘어난 셈이다.

당시 농경 사회에서 땅은 생존과 부의 기반이었기에, 토지 부족이란 곧 생존 경쟁의 격화를 의미했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1500년 무렵 유럽 인구 증가는 토지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고 한다. 모두가 빵 한 조각을 더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인구에 대한 숫자만이 아니었다. 유럽의 상속 제도, 특히 장자 상속제는 땅 부족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당시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가문의 장남만이 거의 전 재산을 물려받고 차남 이하 자식들은 제대로 된 유산을 받지 못하는 전통이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었다. 귀족의 둘째 아들, 셋째 아들들은 가문을 이어받을 땅도 없이 사회에 내던져졌다. 이들은 “뜻밖의 실직자”가 되어 나름의 활로를 찾아야 했다. 선택지는 몇 가지 없었다. 성직자가 되거나, 군대에 입대하거나, 높은 귀족과 혼인하여 다른 집안의 재산에 기대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연고 없이 부랑자로 전락하는 수순이었다.

실제로 역사상 스페인 상당수의 이런 땅 없는 차남 귀족 출신들은 유산 대신 칼을 쥐고 신대륙 원정을 통해 한탕을 노렸다. 영국도 마찬가지여서, 17~18세기에 많은 젠트리 계급의 차남들이 미국 버지니아 식민지로 건너가 담배 농장주가 되었다. 신대륙이라는 신세계가 있었기에 이 “잉여 귀족” 젊은이들은 국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대신 바다를 건너 자신들의 운을 시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지금부터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가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남, 삼남들은 어디로 가게 되었을까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더 이상 바다 건너 황금을 찾아 모험을 떠날 기회는 없어졌다. 유럽 내에 머무르는 인구는 늘어나지만 이들을 받아줄 새로운 땅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좌절한 젊은이들은 사회의 불안 요인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많은 가난한 기사와 농민의 후예들이 신세계로 진출했지만, 우리가 가정한 신대륙이 없는 사고실험 세계에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유럽 각국 내부에는 실업자와 불만층이 쌓여갔을 것이다. 16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이나, 각지에서 나타난 산적과 부랑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을지도 모른다. 사회 곳곳에 “먹고살 길 없는 사람들”이 들끓으니, 치안은 불안하고 계층 간의 갈등은 더 격화되었을 것이다. 왕과 귀족들은 이런 불안한 대중을 억누르기 위해 더 강한 군대와 혹독한 법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대륙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내부의 모순이 그대로 폭발 직전까지 축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인클로저(enclosure) 현상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지주들이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자신의 목장지로 만드는 인클로저 운동은 원래 역사에서도 농민들을 토지에서 쫓아냈다. 마을 사람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함께 써오던 들판과 목초지가 울타리로 막히고 “출입 금지” 딱지가 붙자, 농민들은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인클로저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영국 등지에서 가속화되며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 결과 자신의 땅 한 뼘 없는 떠돌이 노동자와 부랑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블루프린터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부동산금융의 숫자를 읽고, AI로 데이터를 분석하며, 심리학으로 사람의 마음을 탐구합니다. 데이터와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한 인사이트를 나누고자 합니다.

114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1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7화6장. 문화적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