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못했던 우리가 밥상에서 웃기까지
가화만사성. 가족은, 식구는, 모름지기 화목해야 한다는 그놈의 말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방송작가 5년 차쯤 됐을 때였다. 나랑 같이 라디오를 하던 디제이 언니는 배우였는데, 어느 날 모 신문사에서 언니를 취재하러 온다고 했다.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해서 당시 서브작가였던 내가 방송시간보다 일찍 출근해서 신문사 사람들을 환대했어야 했다. '우리 방송 홍보도 될 수 있으니까 친절하게 잘해야지' 회사가 시키지도 않은 최선을 다짐하며, 알아주지도 않을 근면성실을 결심하는 찰나, 스튜디오로 들어선 건, 내 동생이었다.
아, 맞다. 저 놈이 사진기자 한댔지...
시작은 사춘기 무렵이었다. 그전부터 앙숙으로 지내긴 했지만 그래도 말은 섞는 사이였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3살 아래 남동생이 중학교 2학년 무렵, 그러니까 우리의 사춘기가 교집합을 이뤘던 어느 여름, 우린 거실 한복판에서 청소 문제로 아웅다웅 말싸움을 하다 결국 서로에게 쌓인 분노를 무력으로 표출했다. 내가 먼저 잔소리 융단폭격을 퍼부었고, 유도를 배운 동생이 내 멱살을 잡아 업어치기로 받았다. 청소기 막대를 쥐고 있던 난 지지않고 놈의 머리통을 갈겼다. 그 뒤로도 때리고, 밀치고, 던지고, 소리치고.. 그것도 추억이라고 지금은 제법 근사한 슬로모션으로 떠오르지만, 당시로서는 가히 1차 세계대전급 후폭풍이 남았다.
우린 화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 거리며 서로를 경멸했고, 그런 우리 때문에 엄마는 늘 울상이셨다. 아빠는 속상했던 건지, 바빴던 건지, 아님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했던 건지, 별 반응이 없으셨다. 온 식구가 유일하게 마주 앉는 밥상이 제일 문제였다. 동생과 나는 번갈아가며 "안 먹어" 동석을 보이콧 했고, 억지로 끌려와 앉으면 입이 댓발 나와서 밥상엔 늘 냉기가 돌았다.
"니네만 사이좋으면 엄마는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엄마는 밥 먹는 내내, 어린시절 불우했던 엄마가 얼마나 화목한 가정을 꿈꿨는지, 우리 남매가 어렸을 때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부모님 돌아가시면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는데 어쩌려고 이러냐는 둥의 별 무섭지도 않은 협박을 매일 하셨다. 그래서 난, 집을 나왔다.
마침 대학진학이라는 (사실 집에서 50분 거리, 충분히 통학이 가능했지만) 1%의 타당한 핑계가 있었고, 49% 잦은 술자리에 빠져서, 나머지 절반은 동생과 살기 싫어서였다. 그 외에도 동생의 지방대 진학, 군입대, 나의 해외 어학연수 등등으로 성인이 된 우리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화해할 타이밍을 놓쳤고, 적당한 기회 혹은 의지 혹은 필요가 없어서 자연스레 남, 아니 남보다 못한 사이로 10여년을 보냈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쳐도 인사 한 마디없이 스쳐갔고, 집에서도 일체 대화가 없었다. 방송국에서 우연히 마주한 그 날도, 우린 끝까지 누나를 누나라 부르지 않고, 동생을 동생이라 하지 않은 채 헤어졌는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엄마의 61번째 생신이 다가오는데, 서른 중반의 딸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해 드려야 엄마가 삼시세끼 해먹인 자식들한테 노여움이 없으실까, 한 평생 헛살았다 생각을 안 하실까, 고민이 됐다. 보통은 다복한 손주들을 앞세워 화목한 집안 자랑을 위한 잔치를 해드리는 게 초특급 효도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나도, 동생도.. 그럴 형편이 못 됐다. 동생은 돌싱이었고,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장기여행을 계획 중이던 비혼녀(aka 노처녀)였으니까.
"잔치 대신 여행은 어때?"
그래도 효도는 하고 싶어서, 나는 내가 가는 여행지로 엄마 아빠를 초대했다. 내가 먼저 유럽을 돌고 있을 테니 엄마 생신 즈음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오시면 내가 가이드가 되어 열흘 정도 모시겠다 제안했다. 퇴직금으로 경비도 보태드리겠다 했다. 어차피 의지도 안되고 꼴도 보기 싫은 남동생은 다니는 직장 때문에 못 올 거라는 계산으로, 먼저 여행길에 오른 나는, 으레 ‘우리 3식구'만의 계획 짜기에 바빴다. 그렇게 설레는 맘으로 맘앤파파가 오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들도 갈 수 있대!!!"
엄마에게 톡이 왔다. *@$#$#@ㅃ#@^@ 욕부터 나왔다.
"왜 온대? 어떻게 온대?!"
"엄마 환갑이라고 얘기했더니, 사장님이 휴가 주셨대"
"비행기 표는? 걔 돈 있대??"
"... 너 없으면 엄마가 낼게. 엄마 회갑여행인데 다 같이 가야지, 왜? 넌 또 싫어??"
그럼 그렇지. 날 열 받게 안 하면 내 동생이 아니지. 길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녀석과 무려 9박 10일, 그것도 남매의 화해와 가족의 화목을 간절히 바라는 엄마와 함께라니.. 끔찍했다. 나름 퇴사하고 ‘나를 찾기 위한 여행’ 중이기도 했는데, 이 무슨 마음고생인가, 화도 났다. 그러나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바르셀로나 공항.
저 멀리서 보이는 아빠의 커다란 얼굴, 조그맣고 귀여운 엄마가 나를 향해 조그만 손가방을, 이산가족 상봉의 태극기처럼 흔드는 것이 보였다. 동생? 안 보였다. 물론 엄빠와 같이 공항에 도착했고, 거기 어디 있었겠지만, 정말이지 내 눈에 안 들어왔다.
"욕심 내지 말어"
부모님이 오시기 전, 바르셀로나에서 알게 된 한국인 전용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는 나에게 딱 3가지 조언을 주셨다.
1. 웬만하면 아빠랑 남자 형제는 집에 두고 와라.
: 남자들은 패키지여행 때나 껴주고, 자유여행은 말 잘 통하고 느낌 통하는 여자들끼리 다녀라.
2. 많이 걷지 마라.
: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낯선 여행지에선 그런 게 낭만인 거 아는데, 부모님은 관광지 돌기도 체력이 벅차시니 이동은 무조건 택시로 해라.
3. 식사는 제때 가까운 곳에서! _ 이왕이면 하루 한 끼는 한식으로.
: 맛집 간다고 힘쓰고, 돈 쓰지마라. 어딜 간들 부모님은 익숙한 한식 아니면 맛있다 못 느끼시는데, 자식들은 유명 맛집 가야한다고 꾸역꾸역 찾아가다, 낯선 길 헤매고, 줄 서고.. 애쓴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님 반응에 서운해서 울고,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지쳐서 여행 망치는 집 여럿 봤다.
매우 설득력 있는 조언에 감화된 나는, 그때라도 아빠와 남동생을 한국땅에 두고 오고 싶었지만, 왔다갔다 힘드니 1번은 틀렸고, 나머지 두 가지라도 충실하자 했다. 모든 일정을 부모님 위주로 치밀하면서도 간소하게 짰고, 숙소는 취사가 가능한 아파트와 비앤비로 잡았다. 10일간 스페인을 동서남북으로 도는 빡빡한 동선이었지만, 매일 조금씩 일찍 숙소로 돌아와, 함께 장을 보고, 밥을 지어 먹으며 '저녁(밥)이 있는 여행’을 하기로 한 것. 스페인에서는 어차피 한식당 찾기도 쉽지 않고, 찾아도 맛을 보장할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우리 엄마는 세계 어디나 쌀과 집 반찬을 싸서 다니는 분이셨고, 먹는 일에 유독 관심이 많은 우리 식구들로서는 시장에서 낯선 식재료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큰 재미가 될 듯 싶었다. 냉장고에는 이미 엄마가 공수해온 한국의 강한 맛! 꼬똘배기 무침부터 잘 익은 파김치, 깻잎, 고소한 맛! 멸치볶음, 알싸하고 향긋한 마늘잎 짱아찌, 깔끔한 맛! 총각무김치 등이 든든하게 대기 중이었고, 컵라면, 김도 넉넉했으니 저녁마다 스페인 시장에서 신선한 식재료만 공수해 적당히 곁들여 먹기로 했다.
'아, 맞다! 너도 있었지?!'
동생의 존재감이 느껴진 건, 뜻밖에도 주방이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부터 전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동생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냉장고 정리부터 상차림, 설거지까지 주방일에 유독 적극적이었다. 집에서는 밥 먹고, 자기 밥그릇도 싱크대에 안 갖다두는 얄미운 녀석이었는데, 여행 내내 동생은 아침마다 식구들의 밥을 차리고, 저녁이면 누구보다 먼저 재료들을 손질했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빠를 위해 안주를 만들고, 솜씨 좋은 엄마가 소외되지 않게 적절히 조언을 구하는 센스까지 보였다. 비만에 가까운 자신의 몸매 비결이 맛집이었다며 다양한 퓨전 요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뒤처리가 엉망이어서, 엄마와 내가 동생 모르게 매번 따로 마무리를 하며 뒷담화를 했지만, 평소 자기 밥그릇 숟가락도 치우지 않던 게으름뱅이 얌체 동생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아마 동생도 나와의 여행이 불편하고 두려웠을게다. 그래서 나름 그렇게 애를 쓰며 모두를 위해 노력한 게 아닐까. 아무튼 동생의 그런 변화 덕분인지, 아니면 낯선 타국에서 삼시세끼를 꼬박 함께한 시간의 힘인지, 우리 식구는 열흘간 참으로 오랜만에 화목했고 평화로웠다.
평화 : 平和
평화라는 단어를 가만히 쪼개보면, '공평하게 나눈다'는 뜻의 평(平) 자에 '화목할' 화(和) 자를 쓰는데, 특히 ‘화’ 자가 쌀 미(米) 자에 입 구(口) 자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 입에 쌀(밥)을 골고루 나누는 일' 그게 평화일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으며 마음을 나누는 일이 우린, 그동안,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모두가 조금씩 나름의 사정을 감수하고,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 함께 했던 열흘. 머나먼 유럽 땅에서 엄마의 예순한 번째 생일날이 되어서야, 우리 식구는 그 어렵고도 쉬운 일을 해냈다. 맛의 천국, 스페인을 돌고 돌면서 비싸고 귀한 음식도 많이 접했지만, 매일 밤 아슬아슬한 관계였던 동생과 나란히 주방에 서서, 자르고 썰고 볶고 끓이며 밥을 지어 먹었던 평화로운 저녁이 아직도 여행의 따뜻한 추억으로 맛있게 남아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죽는다고,
여행에서 돌아온 우린, 여전히 어색한 남매이고, 한 달에 두어 번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서나 겨우 마주치는 사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불던 시베리아 찬바람은 선선한 가을바람 정도로 누그러진 듯하고, 요즘은 밥상에서 종종 함께 웃기도 한다. 이번 주말에도 나는 동생과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간다. 줄줄이 밀려있는 회사 일과 약속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내 삶에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과 시간을 내어 식구들과 밥을 나누련다. 집밥이 주는 우리 가족의 적당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