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긴 장마 끝.
우산없이 출근하는 새벽, 손이 허전하다.
며칠이나 들고 다녔다고..
집 앞 도로에 대기 중인 주황색 택시 발견.
기사님은 나의 등장이 반가울까. 귀찮을까.
나님의 등장으로 끝나버린 달콤한 휴식시간.
그래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일이 있음에 감사하다,
뭐 그런 류의 생각을 해주시면 좋겠는데..
안경 쓴 여자를 첫 손님으로 태우면
재수가 없다고 믿는
택시 기사님들의 미신을 들은 뒤로
안경 쓴 여자 나는,
출근 길마다 괜히 작아지는 기분이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회사 위치를 말하는 순간,
핸들을 꺾어 유턴하는 기사님의 뒤통수를
옆눈으로 흘겨본다.
길 건너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우주 최고 게으름뱅이인 걸 들킨 것 같아..
뭐, 피곤하니까..
아무도 묻지 않은 대답을 삼키며
머쓱한 마음에 마스크를 올려쓴다.
차 안에 고여있던 퀘퀘한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온다.
왜 습한 날엔 모든 종류의 냄새가 진해질까.
왜 도시의 냄새는 대체로 고약할까.
창문을 열었다.
비 온 뒤 바람.
얼굴에 닿는 감촉이 보드랍다.
으레 달리는 차 안에서 맞던
머리카락 싸대기를 맞게 하던 그 바람이 아니다.
아, 이대로 잔잔한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어촌 마을까지 달렸으면..
윤슬이 반짝이는 가양대교를 건너며 바람했다.
언젠가 서점에서 본 책 제목이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였는데..
매일 여의도로 출근하던
14년차 방송작가가 썼다는 소개에
에잇, 그래도 그렇지,
성수대교 참사를 기억할만한 양반이..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구만. 혀를 쯧쯧 찼던 나인데..
‘오늘 가양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고 가는 어떤 순간,
나 역시 바람했다.
장마 끝,
바람. 바람.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