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百의 그림자》, 황정은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독서 모임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친교까지 나눌 수 있다면 더 좋다는 생각으로. 모임을 다녀온 뒤로는 기왕이면 브런치에도 내 생각을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잘 움직여지지 않는 뉴런을 힘들게 동원해가며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몇 문장 적어보다 나 같은 초짜에게는 깊이 있는 책 분석이라든가 하는 일은 걸맞지 않은 명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개인적이고 시시한 감상 조각들을 널어놓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덧붙여 일독하신 분들을 독자로 상정해 놓고 쓴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개인적으로 영화든 책이든 내용을 미리 알게 되는 경험을 선호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친절한 리뷰가 아니기에 굳이 이 사족을 남겨둔다.)
사실 나는 처음에 百(일백백)을 白(흰 백)으로 이해했다. 표지의 깨끗한 하얀색에 압도되었는지 몰라도 '백'의 '그림자'라니, 대조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숫자를 가리키는 일백 백이었다는 사실은 모임에 가서야 알았다.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웠다. 그래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색을 따지자면 흰 색이 아닐까 하고 강변을 덧붙이기로 한다.
<百의 그림자>에서는 간혹 사람들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처음에는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표현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다. 이것은 어떤 비유일까, 우울해진다는 말인가, 자살 충동이 인다는 말인가 하며 혼란스러웠다. 어느 것도 흡족하지 않아 반쯤 포기한 채 읽다 보니 어느 새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림자는 사람이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총체적 어둠이 아닐까 싶다. 빛이 있는 곳엔 어둠이 있나니. 삶이란 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 우울, 좌절이나 낙망, 비참함 등. 우리는 살아 있기에 슬픔을 느낄 수 있지만, 슬픔이 거세질 때는 도리어 슬픔이 삶을 잠식해버리기도 한다. 본래 '나'의 그림자는 오로지 나에 의해서만 생기는 순수 객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그림자가 '일어서기'도 하는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일어섰나요?
일어섰지, 나도.
여 씨 아저씨가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았다.
나도 살면서 이런저런 사정을 겪었는데 그림자 정도, 솟구치지 않을 수가 있나. 우리 집 현관에서 말이야, 구두를 신고 있는데, 반짝 일어서더라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글에서 느껴지는 예쁜 말씨이다. 대화도, 본문도 가만가만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 백자 같다. 그 말들이 참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별나지 않아서 아름다웠다.
가만히 서 있자 눈꺼풀이 젖어서 묵직해졌다. 아래쪽으로 늘어진 열 개의 손가락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 입술에 고인 빗물 맛이 짰다. 맥이 탁 풀린 채로 얼마간 서 있었다.
돌아갈까요?
라며 돌아서는 무재 씨를 따라서 서벅서벅 사박사박 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
나는 혼자서 토라져 있었다.
*
뒤쪽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삿, 삿, 삿, 하고 들리더니 무재 씨가 은교 씨, 하며 앞서 나가고는 또 금세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것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라고 훌쩍거리며 말하다가 코를 닦고 국수를 마저 먹었다.
세탁기가 탈수를 마쳤다고 조그맣게 알람하고 있었다.
서벅서벅 사박사박, 이라든지 듬뿍, 이라는 아름다운 형용사뿐만 아니고 삐져있기보다 토라져 있었다는 한층 정갈하고 순화된 저 단어들을 보자면 유리알 같은 1 급수 아래로 지나가는 작은 물고기 떼를 구경하는 것 마냥 산뜻해지는 기분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낮은 선반을 더듬어서 전화기를 끌어내리자 선반에 있던 작은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핸드폰은 핸드폰이거나 휴대전화이고, 그 외의 전화들은 모두 전화기라고 나는 언제부터 생각하게 된 걸까. 휴대전화도 전화기, 라는 쌈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언어들을 다루는 이 사람이 새삼 대단해 보인 대목이다.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죽지 않을까요.
죽나요.
어디서든 언젠가는 죽겠지만 나가지 못한다면 나가지 못한 채로 죽겠죠.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대화 중에 유독 되묻기를 많이 한다. 마치 나는 그 말의 뜻을 잘 모르고 있다는 듯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되묻는다기 보다 동의를 많이 하는 편이다. 맞아. 그렇지. 나도 알아. 하지만 은교와 무재는 결코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넘겨짚지 않았다. 그저 그런가, 묻고 그러면 그런가. 할 뿐. 그들에게 이해란 상대방의 말이 뱉어진 그 모양 그대로 넘겨받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이 어떤 적극성도 없다. 그래서 어떤 변형도 곡해도 없다.
주로 ~나요? 라든지 ~가요? 형태로 끝나는 이 말의 어감도 나는 너무 사랑했다. 가라든지 나라는 글자 하나가 더해지면서 순-해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유성이라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타서 사라지잖아요. 허망해.
허망하므로.
허망하므로. 로 끝나서 이어지는 저 여운이 나는 좋았다. 은교의 말을 곱씹는 듯해서 좋았다. 말 한 마디도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왜 허망하냐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에 빠지는 듯한 그 여운이 나는 맘에 들었다.
책 말미에 첨부된 신형철 선생님의 평대로 그녀는 폭력에 매우 민감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언어의 일반화를 포함해서 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가려버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폭력, 그 일반화를 십분 이용하고 있는 권력층의 폭력이라든지는 물론이고, 이런 저런 형태로 짙어지는 그림자들, 그러니까 삶의 그림들을 조용히 비추어 보여준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중략)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중략)
이상해요. (중략)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
그런 방식으로, 축제가 벌어지면 나동 북쪽 외벽과 정면 진입로엔 장막이 걸렸고, 그 뒤쪽엔 아무것도 신경 쓸 것이 없다는 듯 고성과 방가가 이어졌다.
이렇게 본인들이 보기 좋은 것으로 가려버린 뒤에 제맘대로 생각해버리고는 마는 것이다. 누군가의 생활의 터전인 상가를 제멋대로 슬럼이라 규정짓고 그에 가해지는 폭력을 정당화시킨다. 저 장막 뒤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관심에 없다. 그래서 조용하고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공원에 머무는 건 한적함이 아니다. 그 공간에 머물던 숨들이 다 죽어버린 후의 적막이다. 그러나 폭력은 가진 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라고 유곤 씨가 말했다.
쥐며느리가 정말 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입이 있는데, 어째서 물지 않습니까. 입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깨문다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
호랑이고 여우고 간에, 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반구 형태의 양철 갓이 달린 전등을 기판 쪽으로 바짝 밀며 말했다. 이빨 있는 것 앞에서는 좌우지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거란 말이야.
그림자에 이빨이 있나요?
이빨 달린 것에 붙은 놈이니 당연히 있지 않겠어?
이미 그림자들은 누구나 살아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격성을 띠기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 직접적인 해도 가한 적이 없는 쥐며느리를 다만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여버리는 유곤 씨는 그런 의미에서 신문이며, 사람들과 닮아있다. 그 속에서 무재만이 정말 과연 그런 폭력성들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인가, 하고 회의한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나는 쥐며느리를 죽입니다. (중략) 나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귀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말입니다. 때문에 내 방에서는 성경을 만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성경이요?
그것을 사용해서 죽입니다. 성경은 두께가 적당해서 가늠한 거리만큼 제대로 날아가 줍니다. 벽이든 천장이든 문제없습니다. 이렇게 펼쳐서 들고 있다가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유곤 씨가 쥐며느리를 죽이는 도구가 성경이라 함은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이라거나 낡은 전화번호부라든가 그 외 두꺼운 책이 많을 텐데도 굳이, 성경일 이유가 뭘까. 생명을 살린다는 성경으로 생명을 죽인다니.
논외일지 모르나 개인적인 감상을 풀자면 이 세상에 종교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는 거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이나 테러까지 가지 않더라도 바로 우리 주변에서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영혼에 타격을 입히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성경의 말씀이라는 권위적 두께는 그 누군가를 상하게 하고 싶은 만큼 멀리, 어디든지 날아가 주는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결코 인간의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묻어둔 채 말이다.
"스스로 신의 눈길이라고 믿는 인간의 눈길로 쏘아보았다. 어디까지나 편협한 인간의 눈길로 쏘아보았다. 편협하기로 말하자면 결국은 신의 눈길이라고 해도 좋을까. (<낙하하다>, 황정은)"
누군가는 아직 은교와 무재가 덜 친해진 게 아닌가 하고 물었지만, 나는 그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그 자체로 온전히 의지하는 충만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그 사람의 말을 받아주고, 들어주고, 원하는 것을 기꺼이 주는 사랑 말이다. 저 사람이 나를 신경 쓰고 배려해 주는구나를 알고, 알아주는 걸 아는, 또 그 아는 걸 아는 것. 그렇기에 무재는 고작 군밤 하나에 행복해하는 은교에게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이렇게 건네며 아파하는 것이다.
은교 씨, 그렇게 맛있어요?
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맛있게 먹어요.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 덜 폭력적이었으면 /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 진작부터 /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 中
진즉 적어둘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참에는 내 그림자가 자꾸 일어나려고 살랑이고 있었다. 지워져 가는 기억을 더듬어 겨우 남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