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생각보다 너무 어둡기만 한 영화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쉽고 유머러스 한 영화라 좋았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또는 섬뜩한 방식으로 그러나 수월하게 영화의 곳곳에서 전달된다. 피겨스케이팅으로 치면 마치 김연아 선수의 경기 같았달까. 아무튼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무리가 없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영화관을 나올 때는 영화의 여운이 진득하게 어깨에 들러붙어 잘 떼어내지지 않았다. 세부적으로는 일관된 하나의 감상을 말하기는 어려워 내 인상에 남았던 장면들을 위주로 나열해보려고 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아들인 기우가 와이파이를 잡는 것으로 시작한다. 집안 소독은 공공소독으로 대신하며, 이러한 기생적 구조는 기우가 과외교사로 취직을 하며 본격화된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딘가에 '기생'하여 사는 것이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 가족을 곳곳에서 잘 표현하고 있어 좋았다. (아는 지인은 기생충이 나오는 영화인 줄 알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해를 못하고 나왔다고 하던데 나는 다행히도 영화를 보기 전에 기생충이 말 그대로의 기생충류에 속하는 생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를 알고 가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이해하기는 쉬웠다.)
이 차이는 제일 먼저 언어생활에서 나타난다. 기택 가족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있으면서도 너나할 것 없이 입에 욕설을 달고 산다. 아내가 남편을 욕설로 부르는 일도 예사다. 반면 박 사장 부부는 어떻게든 문장에 영어를 섞어 쓰려고 애쓴다. 심지어 과외 선생님 이름도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르기로 한다. (사실 영어를 그렇게까지 쓰는 게 어떻게 부의 상징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상류층의 허세인지 아니면 그것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일지?)
계층 간 차이는 공간적 수직구조로써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기택네 가족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 박 사장 집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계단을 끝없이 내려간다. 또, 문광의 남편이 기생하고 있는 방공호로 갈 때에도 많은 계단층을 내려가야만 한다. 이 계단들은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 꺾여 내려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 계단들을 내려가는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비치면서 박 사장 가족과의 차이가 단순 상하가 아니라 보통의 생각을 뛰어넘는 소위 '넘사벽'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도록 한다. 이 공간적 수직구조는 폭우로 인하여 그 비극성을 더하는데, 같은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 불행을 온몸으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냄새다. 겉모습을 꾸며 입고, 아무리 옷을 빨아 입어도 없어지지 않는 반지하의 냄새는 가난의 낙인이다. 돈으로 다리미질한 것 같은 착한 부자들에게 이들은 단순히 참기 힘든 냄새 정도로 존재한다. 마치 "불을 탁 켜면 스스스스 사라지는 바퀴벌레"같이 존재한다.(박 사장 가족이 캠핑장에서 돌아왔을 때 기택 가족이 거실 탁자 밑에 숨으면서 이런 관계는 곧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앞에서 사람이 죽거나 죽어가도 박 사장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단지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다. 그러나 부자들에겐 단순히 악취에 지나지 않을 이 반지하 냄새는 이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터전 전부와 그 속에서의 애환 모두이다. 기택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기우가 들어갈 때도 그랬고, 기우네 가족이 들어갈 자리를 위해 기존 직원들이 하나씩 잘려나갈 때 박 사장 부부는 본인이 본 것과 들은 것만 믿고 너무도 쉽게 해고를 결정해버린다. 그것도 진짜 문제라고 생각되는 문제는 당사자에게 언급조차 하지 않고 처리된다. 박 사장 부부는 꽤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수족처럼 부려 일하던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에게 관련 의혹을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래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당사자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생계가 끊긴다.
생계가 끊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절히 아는 기택은 이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안고 있지만 아마 박 사장 부부는 그들을 자신의 집에서 내보낸다는 것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냄새와 더불어 이런 '심플'한 판단력은 상층과 하층이 감정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층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해도/않아도 된다는 것 자체가 상층민의 권력인 셈이다. 폭우에 누군가의 세간살이가 모두 잠기든 말든, 미세먼지나 없어지면 좋은 것이다.
기생충에서는 한 인물 한 인물의 서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대적인 서사까지도 같이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봉준호 감독은 '치킨집'과 '대만 카스텔라'라는 단 두 가지 키워드로 어렵게 소규모 창업을 하고도 쉽게 망하는 이 시대의 현실을 확 와 닿도록 표현한다. 기택과 근세는 모두 '대만 카스텔라' 사업을 하다 망했다. 또한 방공호의 책장을 잠깐 비추는 과정에서 헌법이나 법학에 대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근세는 아내의 뒷바라지로 오랜 기간 고시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자 사업에 손을 댔다가 더 크게 실패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숨어 사는 인물. 그 단 5초 남짓하는 씬이 깊이 와 닿았는데, 한 사람의 인생을 말없이 책장으로도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내 책장을 누군가 보면 나의 어떤 서사를 읽어낼까.) 충숙은 투포환(혹은 해머) 던지기 출신으로 상까지 받을 만큼 뛰어났지만 현재는 단지 무력한 가장의 아내일 뿐이다. 그러나 법학책이든 메달이든 아무리 바래고 낡았어도 그 좁은 방공호에까지 가지고 올 만큼이나 챙겨 나와야 하는 몇 안 되는 귀중품 중 하나일 만큼이나 그들에게는 소중한 기억이다. 그리고 이 중 그 누구도 "계획"하고 이렇게 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계획을 하면 안 돼, 사람은."
나는 어떤 계획도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다. 기택이 아들 기우에게 임시대피소에서 하는 이 말이 너무 절절했다. 그동안 수많은 계획들에 배신당해왔던 삶. 그래서 이제 어떤 계획도 기대도 갖지 않고 살지 않겠다는 체념. 무력감. 이제는 그조차 초월해서 아무튼지 어떤 방식으로든 살기 바쁜 기택의 모습이 그 한 마디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실제로 기택의 가족은 절망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물난리가 나 집을 잃은 상황에서도 박 사장의 급한 호출로 구호물품을 뒤져서라도 그럴듯한 옷을 입고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일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필라이트에서 삿포로, 양주로 진화한다거나 과자에서 밥-(원래 피자 박스나 접어주던) 피자집 외식-기사식당 외식으로 이어지는 식사가 바뀌는 모습, 노상방뇨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도 못하다가 물을 끼얹으면서까지 호통치는 태도의 변화 등 역시 봉테일이라고 불릴 만 하구나 싶은 감상 요소들이 많았다. 기우가 늘 소중하게 여기고 들고 다니는 수석도 해석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기정이가 첫 시간에 다송이를 어떻게 길들였는지도 너무 궁금하다.
영화 '기생충'은 구구절절 써내려 왔듯이 이런 모든 것을 한 번에 총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만든 수작임에 틀림없다. 다만 어느 기자님의 리뷰처럼,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타게 된 이유를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납득하게 되어 무거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