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다.
동쪽끝 일본에서 서쪽끝 포르투갈에 도착했다.
회사를 다니며 일본유학을 준비하던 20대 중반만 돌아보아도, 이곳에 내가 서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유럽이라는 곳은 여행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인데, 가장 먼 포르투갈에 서 있다.
새삼 여기까지 걸어온 여정이 참 길게 느껴진다.
시골마을 논두렁에서 개구리잡으며 뛰어놀던 내가 이곳에서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다.
10대의 나의 세계는 그 시골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말이다.
대학, 대학원, 취직, 유학, 그리고 이곳. 돌이켜보면 정적이던 10대와는 달리 20대부터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끊임없이 바꾸어온 듯 싶다. 바꾸려 한적은 없었다. 그저 흐르는데로 맡겼을 뿐인데, 뒤돌아보니 구불구불 먼길을 돌아와 있다.
아, 또 다시 바뀌었구나. 다시 한번 시작이다. 이러한 변화가 안주하려는 나를 깨워준다. 리스본의 생활이 끝나면, 돌아가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될것이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저 내가 갖추어진 환경에서 자랐겠거니 하겠다. 하지만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르다.
리스본에 간다는 소식에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말한다.
우리나이의 여자는 두부류라고. 애엄마 아니면 박봉노처녀. 그런데 너는 멋지다며 칭찬해준다.
나라고 왜 애엄마가 되고싶지 않으랴만은, 내가 선택한 길들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음을 그땐 미쳐 알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무엇때문에 내가 왜 이 고독을 택했을까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과거에 대한 물음은 정신만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리스본의 첫인상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예쁘기만한 보도블럭은 케리어를 굴리기도 힘들었고, 길가에 있는 쓰레기나 개똥, 튀어나온 철사에 부츠가 찢어지고, 지하철 파업으로 추운밤거리에서 3시간이 넘게 버스를 기다려 겨우 집에 온것하며, 도착 2틀만에 이게 유럽이야? 라며 지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3일째 되던 날, 새벽 2시까지 거닐다 택시를 못잡아 애를 먹긴했지만, 난 리스본의 밤풍경에 매료되어 버렸다.
축복받은 기후와 부유하지 않아도 여유로운 삶. 사람의 본성은 그 주변에서 드러난다. 파스텔톤의 페인트칠된 높지 않은 건물들, 테라스 사이로 오고가는 인사들, 길가다가도 툭툭 뱉어내는 이야기들, 옆집 개가 밤에 짖어도 그러려니 하는 그런 푸근함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유럽이 왜이래?' 가 아닌, '리스본은 이렇구나'를 배울수 있었던 곳.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내가 있는 곳에 스며들수 있도록 도와준 곳. 주마등 처럼 리스본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짧았지만 길었던 시간. 현실에 돌아와 보니, 그때의 그 여유를 밀어내고 걱정근심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깊었던 사색들과 50센트로 누렸던 여유로움들이, 그때의 벅찬 생각들이 흐릿해져 몹내 아쉽기만하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깨달은 것 하나, 사람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세살아이에게는 모든게 신기한 천국같은 세상. 내 세상도 내가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마음의 기억은 점점 지워지겠지만, 머리로 기억을 붙잡아 하루라도 더 천국같은 기분을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