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볍게
술을 거의 입에도 못댔었는데, 식사자리에서 한잔 두잔 와인을 곁들이다 보니, 어느새 와인이 내 옆에 있게 되었다. 비록 한잔 이지만 한모금 두모금에 수다의 꽃이 핀다.
이곳에 와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우리네 인생이 돌고 돈다는 것처럼, 사람의 사귐도 돌고 돈다. 사람을 마음에 담지 않고 이 순간을 마음에 담으면, 이 순간만은 가장 즐거울 것이고, 후에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함께 체류하고 있던 친구의 친구가 여행을 왔다고 해서, 우리는 함께 근교를 한바퀴 돌고 둘은 다른도시로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이니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집에 돌아와 자정이 다되어서 나는 스페인 여행에 함께 갈 것을 권유 받았다. 새벽 2시에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8시반 출발을 위해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에는 온라인 시스템도 쉬는지 예약이 되어 있지 않았다. 현장에서 바로 구입하여 우리는 세비야에 도착했다.
아직은 서로들 어색한 사이여서, 각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거닐었다. 다들 수면 부족 상태라 중간중간 자러 들어가고, 나는 다음날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5시반쯤 되면 해가 뜨겠거니 하며 밖을 나갔다. 플라멩고 클럽에서 공연을 마친 연주가들과 길거리에 듬성듬성 남아있는 관객들이 흥의 여운을 거둬내고 있었다.
유럽에서의 여행이라면, 처음인 이곳, 새벽, 인적없는 이 밤에, 난 혼자서 그 미로같은 세비아 골목길을 거닐었다. 아무래도 동행이 생기면 보고싶은 것을 못보기에, 느긋하게 즐겨볼 심산이었다. 다행히 아무일 없이 두어시간을 거닐고, 공원에 앉아있으니, 슬슬 말발굽소리도 들려온다. 말똥 때문인지 물청소로 거리가 흥건하다.
7시반이 되어도 해는 뜨지 않았다. 공원에서 고인물로 목을 적시는 고양이 옆에 앉아 말을 걸으니, 무릎에 올라탄다. 너도 추운거구나. 근데 몸집이 큰데, 내려가라고 말을 못했네.
친구가 묵는 숙소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시 숙소로 들어와 자고 10시반에 친구들을 만났다. 10시반인데도 아직은 해가 바짝뜨지 않았다.
어제 저녁을 거른탓에 맛있게 고기로 점심배를 채우고, 두어시간의 관광후 우린 또 두어시간의 수면시간을 가졌다. 그래, 우린 이제 젊지 않구나!
푹 쉬었겠다,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우리는 다시 모였다. 서른다섯해 동안 우린 남남이었으니, 공유할수 있는 이야기 거리가 많지 않았지만, 한잔 두잔 넘어가는 와인에 왁자지껄해진다.
유럽에서는 와인을 병째 시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로는, 웨이터가 그러지 마시라고 말리기도 한다. 우린 셋이다 보니, 두어병 올려두고 떠들고 있자니, 주변에 아저씨들이 힐끔힐끔 아이컨텍을 시도한다. 어지간해서는 미소로 대꾸해주고 싶지만, 지금 이순간 우리셋은 서로가 너무 즐거워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
비틀비틀 거리며, 서른다섯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글쎄.. 고민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은, 불확실한 미래 때문인가? 나는 학생, 결혼을 앞두었지만 정직을 찾고있는 친구, 좋은 직장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시작을 하는 친구. 우리가 불안정한가?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렇다. 불안정이라는게 무엇인지. 우린 각자 아무것도 안하는건 아니지 않는가. 불확실한 미래라면, 포텐터지는 확률도 반반이다. 걱정해서 무엇하리.
'야!! 우리 열심히 살자!'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런데 왜 열심히 살아야되는지 모르겠어'
'열심히 사는건, 뭔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너희가 엘리트고, 내가 시골에서 자랐어도, 결국 우린 여기서 같이 와인을 마시고 있잖아!'
'어쨌든 와인은 맛있어~'
'우리 그럼 거기에서 의미를 찾자!'
'맛있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열심히 산다고!'
두서없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우린 통하고 있었고, 즐거웠다.
그랬다.
흥겨운 음악을 들으면 어깨가 들썩들썩 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생각.
순간을 즐기면 된다, 과거와 미래는 접어두고 현실에 충실하자.
와인이든 삼겹살이든, 이 순간 같은 곳에서 '함께' 즐기고 있다는게 감사하지 않은가.
그런 여유의 한 순간들을 위해,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야!! 세비야 골목은 예술이야!,
앞으로만 걸었는데 제자리네~~!'
와인이 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