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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K Sep 21. 2015

종이, 놓치지 않을 거예요!

독일인의 종이 사랑 

독일 사람들은 종이를 참으로 좋아한다. 

세계적 펄프-제지 전문 조사기관인 RISI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독일은 2010년 기준 1인당 연간 종이 소비량은 총 174개국 중 4위로 242kg, 대한민국은 187kg으로 13위를 차지했다. 세계 1인당 연간 종이 사용 평균량이 57kg인 것을 감안하면 독일인들이 얼마나 많은 종이를 사용하는지 알 수 있다.


독일의 종이 사용, A to Z

독일에 살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점은, 음식도 아니고 날씨도 아닌 바로 이 종이들과의 싸움이다. 비단 나 뿐만 아닌 많은 유학생이나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독일에 살면서 매일 우편함을 열면 적어도 하나 이상의 편지가 도착해있다. 은행, 보험, 각종 가입된 클럽 및 지역 단체의 공지 등등. 지난 6월, 도이치 포스트가 파업을 하고 난 후 독일 전체는 엄청난 홍역을 앓아야 했다. 평소보다 길어진 파업으로 인해 제때 도착하지 않는 편지 때문에 벌어지는 사연이 끊임없이 TV와 라디오 전파를 탔다. 삶의 많은 것을 우편물에 의존하는 독일인들에게 3주간의 파업은 각종 회사 및 공공단체를 비롯하여 개인 생활까지 멈추게 한 것이다.

사진: © fovito - Fotolia.com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했어도 독일에서는 아직 종이가 갑이다. 손으로 싸인 한 종이만이 진정한 문서가 되고 증거가 되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며칠 전 나는 유료 멤버십 취소를 위해 해약통지서(Kündigung)를 담당 회사에 취소 사유를 적고 서명을 한 후 우편 발송을 하였다. 일주일 후 당사로부터 접수 확인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보통 해지 및 해약 3개월 전에 편지가 도착해야 한다. 이밖에도 독일에서는 보통 이사 가기 3달 전 집주인에게 이사 간다는 편지를 써야만 손해 없이 이사를 할 수 있다. 직장 이직 또한 마찬가지이고, 모든 가입은 종이로 된 가입통지서를  주고받아야 인정된다. 


사진: HP

인터넷을 비워라! "Der Versuch das Internet leer zu drucken." 

킴 카다시안은 엉덩이로 인터넷을 부숴버렸지만, 독일인들은 인쇄를 통해 인터넷을 정복하는 듯하다. "Der Versuch das Internet leer zu drucken." 나의 직장 동료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했던 말이다. 인터넷의 자료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 무조건 다  프린트해 놓으라는 것이다. 담당자와 주고받은 이메일 및 대화 내용, 인터넷 자료 등 많은 독일인들은 이렇듯 인터넷 자료를 인쇄해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만으로도 간단히 가입 및 해약이 가능하고, 각 종 중요 서류도 인터넷을 통해  주고받을 수 있는데, 독일은 왜 이 많은 종이들을 못 만들어 안달인 것일까? 그리고 이 많은 인쇄된 종이들은 어떻게  관리되는 것일까?



독일인의 Ordner(파일철) 사랑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바로 이 Ordner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학교나 직장, 각 가정집에 가면 독일인들은 이 Ordner 속에 모든 서류, 영수증 등을 보관한다.  


"Ordnung muss sein" (*모든 것은 정돈되어야 한다)

"Ordnung hilft haushalten" (정리는 살림을 도와준다)

"Ordnung erhält die Welt."(정리는 세상을 유지시킨다)

"Ordnung hat Gott lieb." (신은 정리를 사랑하신다)


이와 같이 독일에는 Ordnung(정리, 정돈, 규칙)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 생활 속 많은 곳에서 정리를 하는 Ordner(파일철)이 있고, 심지어 각 도시 및 지역에는 Ordnungsamt(질서유지 관련기관)가 존재한다. 이렇듯 독일인들은 질서 정연하면서도 모든 것이 컨트롤 가능 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회 대부분의 시스템이 이 Ordnung의 원칙 속에서 유지되고 있고, 이러한 정리 습관이 없으면 각종 밀려드는 서류더미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몇 해 전, 외국인청(Ausländeramt)에 비자 연장을 위해 들린 적이 있다. 물론 2달 전에 미리 편지로 약속 시간, 장소 및 준비서류를  통보받았다. 담당자와 마주하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의 서류꾸러미를 보았는데, 그 서류철에는 내가 독일에 입국한 순간부터의 모든 서류 및 정보가 담겨있었다. 내가 그 날 제출한 서류는 모두 복사되어 그 서류철에 보관되었고, 이사를 간 후에 그 두꺼운 서류철들은 내가 이사 간 도시의 외국인청으로 이전되었다. 대한민국의 2배의 인구수와 엄청난 외국인이 있는 독일에서 개개인의 서류가 이렇게 보관이 된 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독일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정리정돈 강박증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로마시대를 거쳐 각종 전쟁을 통해 점점 정리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시스템화 된 것이라고 한다. 국민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불변의 것이 아닌,  깨닫음과 변화의 과정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인터넷이 마비가 되어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일은 정상적으로 업무가 가능한 나라라고 한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답답해 보이지만, 이들이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았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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