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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고도 Aug 10. 2018

D+52. 나의 구직 소개서

서른네 살에 다시 쓰는 이력서와 자소서, 그리고 토익 공부

written by 집순이


세계 여행을 끝내고 당분간 멍도 때리고 울릉도, 판문점 등등 국내 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발등에 불이 훅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져 요 몇 주 열심히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나는 출판사 편집자, 남편은 비영리재단 모금가.

간만에 이십 대 중후반 생활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 쫄린다, 아, 왜 면접 보라는 연락이 안 오냐, 이럴수록 밥은 맛있는 걸 먹어야 해, 아침은 든든하게, 점심은 배부르게, 저녁은 거창하게! 구호를 외치면서 열심히 밥해 먹고, 선풍기 한 대와 밥심으로 힘내서 이력서 쓴다.


짐 남편과 둘 다 토익 점수가 없어서 토익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런 주제로 남편과 얘기했던 게 대체 몇 년 전이냐....싶어서 좀 웃겼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십 대 때 둘 다 카페에서 동시에 이력서 썼던 기억은 없다. 둘의 졸업 연도도 다르고 난 이직을 꽤 했지만 남편은 회사 한 군데를 오래 다녔으니 둘이 동시에 구직 중이었던 때가 없었던 것도 같다.
서른넷 된 어른 둘이 같은 방에서 이력서 쓰면서 이력서 폼 공유하자, 이러고 있으니 이건 웃긴 일이니, 슬픈 일이니. 이건 재밌는 일이지.
인생 백 세 시대니까 이런 순간이 앞으로 또 찾아오겠지. 자식이랑 셋이 이력서 쓰면서 이력서 폼 공유하는 날도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기본 몇백 년씩을 살다 죽었으니 그때 생각하면 인간에게 떨어진 형벌로서의 노동 강도가 조금 약해졌다고 봐야 하나.(그럴 리가!)
이력서를 고치고 또 고치면서 나는 어쩌자고 커리어 관리가 이런가, 자괴감을 느끼진 않는다. 그 단계는 어느 순간 지나갔고 요즘은 이게 납니다,라고 생각할 뿐이다.


가장 최근에 일했던 곳은 출판사다. 세어보니 2년 2개월 동안 있었고 책임편집으로 소설책 2종 3권, 포토에세이 1권을 출간했고 소설 공모전을 두 차례 진행했고 방송 제작사와 드라마 대본 계약해서 (회사 내 다른 작가와) 공동 집필했다. 북트레일러를 만들고 회사 SNS를 관리하고 온라인/오프라인 서점용 책 광고 이미지들도 제작했다.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처음으로 만든 책 소설 <조선총잡이>를 손에 쥐었을 때랑 내가 만든 책 광고 이미지가 교보문고에 걸렸을 때.
사실 제일 기억나는 순간은 회사가 한 번 엎어지면서 사람들 우르르 퇴사했던 날. 그날 대표님은 말없이 오전에 가방 들고 사무실을 나갔고 남은 직원들은 회사 옆 건물 요거프레소에서 딸기요거트랑 망고요거트 시켜놓고 몇 시간 동안 수다 떨다 헤어졌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른 직원 한 명은 회사명만 바뀌고 대표님은 그대로인 회사에서 이후로도 쭈욱 편집일을 같이 했지. 그때 같이 요거트 먹던 직원들이랑 조만간 만나기로 했다. 우린 이따금 연락하고 지낸다. 회사의 사정과 사람의 사정은 다르니까요.
그전에는 법무부 방송국, 영상 제작 회사, 프리랜서 PD로 일하면서 영상을 기획/제작/편집했고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소년원 아이들의 일상을 촬영하고 그 애들과 수다 떨던 날들, 애정 결핍의 왕이었던 여자 소년원 애들의 재잘재잘 거리던 목소리들. 먹어본 급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소년원 급식. 침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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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면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 중 몇 개를 요리해준 사람에게 레시피를 캐물어 메모해놨었다. 요즘 그 메모들을 들춰가며 하나둘씩 요리하고 있는데 그때의 그 맛과 아주 똑같진 않지만 얼추 비슷한 맛이 나서 향수를 자극한다. 혀 끝에서 여행을 복기하는 느낌이랄까.


스페인식 토마토 냉수프와 아르헨티나식 가지 딥소스를 만들었다. 세계 여행은 끝나도 세계 음식 요리는 계속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먹고 반했던 뻥튀기+크림치즈+토마토 간식과 터키 조식 메뉴 중 하나인 토마토 요리를 만들어 친구들을 초대했다. 토마토로 별 걸 다 만드는 월드 푸드의 세계.



* 여행 이후의 삶, 그리고 아직 남은 여행 사진들
집순이 인스타 @k.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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