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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토타입L Jan 02. 2022

로봇, 휴먼, 몸

年記2021 All too human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걸 알지만

차라리 로봇이 되고 싶었다. 간절하게.


초대장을 보내주던 회사사람들, 그리고 수없는 업데이트에도 사용성에 별 차도가 없는 아웃룩과 이별한 후, 캘린더를 조각조각 쪼개고 색을 입히는 것으로 새로운 한 주를 준비, 혹은 프로그래밍한다. 나는 캘린더를 만들고 캘린더는 나를 만드는 역시 얼토당토않은 그런 논리를 가지고서.

스크립트는 제법 정교하나 이 로봇은, 아니 휴먼은 실행을 제대로 못한다. 어떤 조각들은 태어난 곳으로 부터 90여 일을 떠나기도 했다..

당이 떨어진 날, 호르몬 과분비의 날, 빗방울과 함께 통통거리러 마음이 밖으로 나가버린 날에도 몸은 스크립트를 실행할 수 있다면..

새로 나온 라면 봉지에 적힌 조리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약속한 배송일에 반드시 도착하는 쿠팡맨처럼 왜 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러니까 때론 나를 버리고 싶었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때, 시련이 나를 통과할때, 그 정도가 심각해서 완전히 다시 시작하고 싶을때, 자리를 떠나는 방법이 종종 채택된다. 그렇게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로 도망치고 싶던 시험은 어디를 가든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곤 했다.

이럴 때야말로 나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더라도 이 몸에서만은 떠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머물러야한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면, 누가.

물 속이나 화성에서 살 수 없고 오직 지구의 흙 위에서만 살 수 있는 까다로운 몸, 광합성을 할 수 없어 밥을 떠 먹여줘야만 움직이는 성가신 몸, 깨지기 쉬운 마음을 품고 있어서 상처받기도 쉬운 몸. 그러나 이런 조건들이야말로, 이런 조건의 몸에 살아야한다는 그 조건이야말로 인간이 성장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으며, 신의 아들도 바로 이런 몸으로 우리와 함께 머물렀단 이야기에 위로받았다.


엘레베이터가 열린다. 어떤 사람이 엘레베이터에 들어가다가 걸려 넘어지고, 상체부터 무릎까지는 엘레베이터 안에, 나머지는 밖에 남겨지게 된다. 엘레베이터는 문을 닫았다. 고장난 엘레베이터는 문 사이에 사람의 다리를 둔 채 올라갔다. 호출한 층까지 그대로 한참을.

오래전 신문을 통해 알게된 사건이다. 요약할 것도 없는 단신.

고통과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심지어 그런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유발하는 당사자로서 작동을 멈추지 않은 비정한 기계들에 대해, 그런 모습을 한 휴먼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 드문 사건이 아닌데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테슬라의 자율주행 오류라면 모를까.

로봇이 되고 싶었다니, 끔찍한 소리.


누군가의 고통을 인지하고 멈추는, 멈추지 못한 경우 깊이 슬퍼할 수 있는 소질만으로도 휴먼은.. 휴먼. 보살핌과 너그러운 대접을 받아 마땅한 소중한 휴먼. 어느 휴먼이라도, 나라도.


그러므로 현재의 몸에 더 잘 머무르겠다고 (그러지 않을 도리도 없지만) 다짐하는 한편, 오늘밤 특별히 고마운 몸들을 나열해보겠다: 콩나물과 쌀을 재배하는 몸, 그것들로 국밥을 만드는 몸, 따뜻한 콩나물국밥을 배달해주는 몸, 또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몸, 그것을 녹음하고 애플뮤직에 등록해 내가 들을 수 있게 해주는 몸,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들뜬듯, 하소연하듯 알려오는 몸.

나의 몸보다 먼저, 더 유의미하게 이들의 몸이 나의 영혼을 살리고 있다는 점을 까먹지않으려고.


이사하자마자 물건 버리는데 열중한다고 친구가 전해왔다.

아니 왜 버릴 물건을 새집까지 가지고 간거야

그럴 시간이 없더라고 일단 다 싸서 왔어

벌써 몇달 전이니 이젠 다 정리했을까.


새롭게 다가오는 한해 앞에서 버리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시간은 그저 한순간씩 펼쳐질 뿐, 초조한 휴먼의 심정을 헤아릴수 없으니 일단 다같이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트럭에 실었다 다시 내릴 필요도 없이. 무언가를 완성하거나 고치는 것과 해가 바뀌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을 어떻게 시작하든 당신의 몸이 건강하길, 거기서 건강한 마음이 머물며 무럭무럭 자라길 바란다.


#Alltoo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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