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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토타입L Jan 01. 2024

부서진 세상에서, 함께

年記2023 How to proceed in brokenness


성찰은 발목을 잡는다. 마찰은 속도를 더디게 하고, 일의 진행을 막고, 관계를 불편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초전도체 레시피에 열광했던건지도. 고무타이어와 도로처럼 마찰은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데 꼭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프로그램된 대로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게임 캐릭터가 문득 자기 존재에 대해 질문할때 glitch in the matrix라고들 부른다. 인간세계에서 성찰은 오류가 아니라 기능에 가깝다. 이것도,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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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무너졌다. 매년 절정에 이르면 눈이 시리게 화려한 꽃을 뽐내던 주다스 나무가 지난 여름 며칠간 지속된 태풍에 그만, 폭삭. 나무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동네 사람들에게 비통한 일이었다. 나무 의사들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 자리에 작고 여린 묘목이 심겼다. 무덤이 곧 요람이 되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위풍당당하게 굵은 가지들을 쭉쭉 뻗고 우뚝 서 있던 나무가 하룻밤 사이 땅 위로 주저앉아버린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좀 부서졌다. 묘목이 주는 희망은 그에 비해 초라했다.


내가 심지도 가꾸지도 않은 나무의 일을 가지고, 더군다나 나처럼 늠름한 사람의 마음이 부서진다는건 살아있는 마음이 원래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는지 되새겨준다. 게다가 나무 말고도 부서지는 것들, 꺾이는 것들은 왜 이렇게 많을까.


그럴 때마다 주저앉을 순 없기에 모든 긍정적인 교훈을 끌어모아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투지를 붙들 순 없다. 꺾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헤어진 결심의 해준처럼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조차도 비버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유투브의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오래된 영상에서 사육사는 집을 부수고 비버는 잠시 망연자실한듯한 표정을 짓고선 이내 다시 집짓기를 시작한다. 이 과정 그대로가 일상의 크고 작은 부서짐을 마주했을 때 해야 할 일 아닐까.


사실 부서지는 건 그나마 회복 가능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건들은 천천히 닳아 없애거나 단번에 불태워버리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어떤 조각이라도 남아 있어서 그걸 가지고 뭔가를 언젠가는 다시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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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걸리는건 괜찮다. 그게 일이든 생명체든 부서진 부분을 보자마자 당장 고쳐야겠다고 달려든다면 이 세계도 인생도 우리 몸도 그저 유지보수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무언가 부서지고 멈추면서 그 동안의 삶이 얼마나 기가 찬 방식으로 움직여왔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더 나은 방식을 고민하게 해준다.


그렇게 매끈하지 않은 것도 괜찮은거 같다. 함께 살던 이불장인이 손님들 이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수십 조각 기워 만든, 장미꽃 옆에 코끼리, 그 옆엔 풍선이 감쪽같이 붙어있던 그 이불이 얼마나 친환경적이면서 실용적이고, 독특하게 아름다웠는지, 무엇보다 얼마나 따뜻했는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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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지 않을 수도, 부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에 부서짐은 이 세계의 속성이자 삶의 조건이 된다. 썪지 않는 햄버거 같은 무리한 꼿꼿함이 이상하다고, 위험하다고 알아볼 수 있는 곳.


다소 부서진 채로 한해를 보내고서 곧바로 다음 한해가 많은 부서짐과 마찰과 오류를 동반해 온다. 그러니까 친환경적이면서 실용적이고, 독특하게 아름답고, 따뜻한 그런 무언가를 계속 만들 수 있도록 파편들 속에서 모두 함께 잘 걸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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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The Commons, Lauren Berlant (2016)

사진: Carnaby Street, London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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