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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12. 2024

그러면 마셔야죠

정지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분께 한참 전부터 정지아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라는 이야기를 꾸준히 들었다. 한데 나라는 청개구리... 다른 사람들이 어떤 책에 관심이 있는지 누구를 좋은 작가로 평가하는지는 엄청나게 관심이 많으면서 막상 추천을 받으면 바로 챙겨 읽을 마음을 못 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강력 추천하셨으나... 여기서 한 번 더 울고 가기로 한다. 개굴.

그럼 무엇을 먼저 읽을까. 단편집일까 에세이일까. 그냥 두 권 다 빌렸다. 손이 먼저 간 것은 에세이였다. 자신이 애주가임을 시원시원하게 밝히고 쓰는 작가들의 글은 희한하게 쾌청한 맛이 있다. 내가 한때 술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기...


그나저나 중장년으로 접어든 이들의 삶을 돌이켜보는 에세이는 젊을 때는 몰랐는데 나도 나이를 먹고 보니 비슷한 입장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읽게 되는 맛이랄까 감성이랄까 그런 게 확실히 생긴다. 한편으로는 나도 진짜 재밌는 20대를 보냈는데, 묻어두긴 아까운데 싶으면서도 이 에피소드들을 다 풀었다가는 연락 다 끊긴 20대 때 지인들에게 야 그걸 쓰면 어떡해, 하고 항의성 연락이 빗발칠 게 무서워서 묻어두기로 한다(정동극장 무대에서 연주하던 날 수트 쫙 빼입고 와놓고는 흰 양말 신고 와서 산통 다 깰 뻔했던 친구도 있었는데... 뫄뫄 병원 원장님이 되신 지금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더 얘기 안 해야지(이미 다함)). 술자리 시다바리 해주던 괴도 세인트 테일(천사소녀 네티)의 광팬이었던 귀여운 공돌이 후배도 생각나고...


http://aladin.kr/p/j4HLt



표지 일러스트가 몹시 귀엽다. 한잔씩 걸치다 말고 헤롱헤롱하는 고냥씨 두 분이 계신다.


나는 정지아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 순식간에 다 읽어버릴 정도로 재미있어서 놀랐고, 에세이 한 권을 읽은 것으로 이 분에 대해 꽤 잘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놀랐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에세이가 뭔지 잘 모르겠다. 학생 시절만 해도 에세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제법 또렷하게 대답했을 것 같은데 점점 갈수록 그래서 대체 에세이가 뭔데???라는 질문이 커져갔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출판 시장의 사이즈에 관계없이, 에세이의 장르적 포용력은 갈수록 관대해져서, 이제 특별한 형식이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글은 모조리 다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비딱한 생각을 제법 자주 했다. 아무튼, 그래서 에세이. 챗GPT한테도 물어봤다. 너는 에세이가 뭐라고 생각해? 내가 깔아 둔 채티(라고 나름 애칭으로 불러준다)는 퍽 장황한 답변 뒤에 이렇게 요약해 주었다.

물론 우리 채티는 아차 하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럴싸한 거짓말도 잘 하지만 -_- , 이 요약은 납득가능한 선이므로 그대로 인용하겠다.


에세이는 개인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글쓰기 형식을 취하는 문학 장르로,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형식의 자유로움과 주제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며, 독특한 개인적 통찰을 담고 있어 다른 문학 장르와의 차별점을 가집니다.


위의 요약에 의거하여「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의 에세이적 특성을 짚어 보겠다.


개인적이다. 맞죠, 주(酒) 생활에 관련된 사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줄줄이 밝히시는데 아닐 수가.

논리적... 이죠. 네. 이건 읽어보시면 무슨 의미인지 아시리라(폭소).

작가님의 생각(사람을 좋아하면 술은...)과 감정(술 없는 인생=앙꼬 없는 찐빵)... 완전 설득됩니다.

독특한 개인적 통찰(아무튼 조니워커블루 최고)을 담고 있... 그러네요.


웃기게 썼는데, 사실 웃음이 팡팡 터지는 글은 아니다. 외려 코끝이 맴맴해지는 글이고 시골에 계신 할머니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줄 때 느낄법한 그런 마음이 때때로 울컥 솟는 그런 글이다. 그가 마셔왔던 술들은 그냥 술이 아니고 추억이고 다정이고 삶이었다. 그런 술이라면 얼마든지 마셔주고 싶다. 그렇게 함께 마셔줄 사람들이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10년쯤은 만나야 아,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A는 처음에 훅 들어온다. 서로 살가워질 때까지 시간과 공력을 쏟아붓는다. 친구가 되었다 싶으면 긴장이 풀리고 그래서 처음보다 느슨해진다. 누구의 방식이 옳고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서로의 방식과 속도가 다를 뿐이다. 알면서도 이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관계를 처음 맺을 때는  A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나에게 서운했고,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내가 예전처럼 자주 오지 않는  A에게 서운했다. 뭐, 그러면서 조금씩 더 알아가고 더 친해지는 것일 테니 큰 상관은 없다. -162쪽
그날 나는 다정에 대한 오랜 갈급함을 버렸다. 다정한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표현을 잘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다 괜찮다. 각기 다른 한계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까. -199쪽
그들과 우리는,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그날 알코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잠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경이를 경험했다.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달이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술이 천천히 우리의 혈관을 데우고, 모닥불은 사위고, 그렇게 초원의 밤이 깊어갔다. -208쪽


최애주 한 잔씩 곁들이시며 고즈넉한 가을밤을 즐길 수 있는 주말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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