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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무 Jan 31. 2022

2022년 2월. 어딘가에 있을 나의 언니들.

김태호 새 예능 <서울 체크인>을 보고


김태호의 예능을 보면서 어딘가에 있을 나의 언니들을 생각했다


김태호 피디가 20년간 몸담았던 MBC를 퇴사했다. 그의 퇴사는 그가 만들어온 예능 프로그램의 화제성만큼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2021 MBC 연예대상이 그가 MBC 예능 피디로써 공식적인 마지막 일정이었고 대중들은 그의 다음 행보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그의 다음 작품 소식이 들려왔다. 세상에 나쁜 콘텐츠 아이디어는 없다는 믿음을 여러 플랫폼에서 다양한 콘텐츠로 증명해 보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퇴사 후 첫 시도는 국내 OTT 플랫폼에서의 리얼리티 예능이었다. 그것도 그와 오랜 인연이 있는 한때 톱스타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제주댁으로 유명한 이효리를 간판으로 내세운 <서울 체크인>이라는 관찰 예능 콘텐츠다.

김태호 피디와 이효리의 인연은 무한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김태호 피디는 놀면 뭐하니? 에서 환불원정대와 싹쓰리로 대박을 터뜨리며 이효리를 다시 무대 위로 불러냈다. 그런 케미를 자랑하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보여준 <서울 체크인>은 화려함보다는 담백함 쪽에 가까웠다. 제주에 사는 이효리가 서울에서의 스케줄을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하면서 김포공항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까지의 짧은 여정 동안 그가 누굴 만나고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 카메라로 따라다니면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설 연휴 첫째 날인 토요일에 공개된 파일럿 0회에서는 12월에 있었던 MAMA에 호스트와 클로징 무대에 오른 이효리의 2박 3일을 담았다. 민낯에 패딩 모자를 눌러쓴 이효리는 무릎이 나온 츄리닝을 입고 스우파 리더들과 MAMA무대 리허설을 하고 화려한 무대를 준비하는 대기실에 앉아서 세상은 다 변했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그 헛헛함을 가진 채 엄정화가 있는 레지던스에 가서 그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언니는 그 마음 알아요? 하는데 엄정화는 내가 그걸 왜 모르니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이효리를 안아주는데 이효리는 그때의 엄정화에게는 지금 나처럼 언니가 없지 않았냐며 혼자 어떻게 견뎠냐고 너무 짠하다며 되려 눈물을 쏟는다.

나는 이효리라는 캐릭터는 동시대 한국 연예계에서 가장 솔직할 수 있고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으면서 단단한데 유연하고 성숙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왔다. 김태호 피디는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효리가 타이틀로 나오는 예능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위로와 해학이 깃든 단짠 삶의 현장이 이효리의 삶에 오롯이 있다. 한때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고 없지만 전성기가 아니더라도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그 자체로 힘이 되는 모델이 아닐까 싶었다.


살다 보면 누군가 나보다 먼저 이 계단을 올라가고 스포트라이트의 뒤안길로 걸어가는 선배가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준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고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가주는 것만으로도 저기 멀리 희미하게 보일지언정 한때 빛났던 존재가 아직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것만으로도 우주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따스한 위안을 느낀다. 일을 할 때에도 같은 길을 가는 이들만이 공감하고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만남이 있다. 모두가 각자가 마주한 고통으로 힘겹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음에 느끼는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 말이다. 선배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우직함, 그게 진짜 간지고 진짜 멋이구나를 이효리가 한 명씩 선후배를 소환하면서 이어지는 이 뼛속까지 솔직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뭉근하게 느꼈다.


내가 본 <서울 체크인> 0회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따스한 존경심을 느끼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사라지되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낡고 오래돼서 이제는 유행이나 전성기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 자리에 자기다움을 더 꼭꼭 채워가며 그렇게 자신의 삶에 성실하고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야말로 진짜 멋지게 사는 방식이라는 것을 간접 체험했다. 30대를 지나는 보아가 어렸을 때는 타인의 시선에 너무 예민했는데 지금은 자기 자신의 만족으로 시선이 옮겨오고 있다고 말할 때 나 또한 마음 깊숙이에서 공감하며 끄덕거리다가 70분 남짓의 프로그램이 끝이 났다.


진짜 자유로움이란 무엇일까?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내 내면으로 옮겨와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에 충실하게 반응하며 사는 삶, 그랬을 때 내 안에 더 이상 외부로부터 오는 만족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스스로 가득 찬 여유로 타인을 대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자유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김태호 피디가 20년이나 몸담은 타이틀을 훌훌 벗어던지고 처음 시작한 예능에서 가장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삶을 보여주고 있는 이효리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어딘가 참 김태호 피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성찰할 때 새로운 아이디어도 나오고 재미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부디 그가 앞으로도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해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그처럼 올 타임 레전드가 아직도 자신의 길 위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주의 많은 먼지들이 위로받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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