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 보다는 뫼르소가 더 어울려, 이 세계의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다시 읽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역시나 그는 개망나니였다.
10년 전쯤에 햇살을 고스란히 담은 바다가 눈부신 해변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개를 보았다. 그것들은 어슬렁어슬렁 해변을 거닐며 해변 후미진 곳에 코를 킁킁대며 먹을거리를 찾고 정해지지 않은 곳에 누웠다. 개를 보며, 다르지 않구나,고 생각했다. 개 같은 인생은 그러니깐 개들이 보내는 시간이라는 게 잠 오면 자고 먹을 게 있으면 먹고 거기나 여기나 상황에 따라 찾아먹느냐 받아먹느냐만 다를 뿐 다른 게 없었다.
지중해 인간, 조르바. 햇살을 듬뿍 받은 대지와 해양을 품은 남자. 그는 내가 10년 전쯤에 보았던, 개를 닮은 개는 아닌 개망나니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유럽인은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떠나고, 우리는 국토순례길을 떠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죽음에 대하여>에서, 그는 개인의 휴가 계획이나 하루는 의미가 있으나 그 총체(삶)는 개인 스스로에게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번 여름휴가가 나에게 휴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런 것들의 총체(인생)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사색에 빠지지 말라고 그 이상의 의미는 찾을 수 없다, 고 한다. 대신 나의 삶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조르바는 자신의 삶에 대해 큰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 사는 개망나니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난 크레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화자)에게는 의미를 부여한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인생은 HEAR AND NOW,라고 한다. 여기 그리고 지금에 충실한 게 인생이라고 조르바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나는 조르바가 그저 개망나니 같기만 하다.
오히려 나에게는 같은 지중해 남자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 뫼르소가 더 현실감 있다.
조르바는 그리스 인간, 뫼르소는 알제리 인간, 둘 다 지중해 인간이다. 지중해 인간들은 좀 다른가?
4계절을 사는 우리들은 봄에는 모내기를 하며 여름의 비를 걱정하고, 여름에는 가을의 가뭄을 걱정하고, 가을에는 겨울나기를 걱정하고, 겨울에는 봄의 보릿고개를 걱정했었다. 계절별로 변해야 하는 우리들의 삶은 다음을 걱정하는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부지런함의 순환이었다면, 지중해의 삶은 늘 변함없기에 다음이 아닌 지금만 생각하는 안도감과 게으름의 지속이 아니었을까.
처음에 개 이야기를 했다. 개가 그랬다. 여기에서 개는 먹이를 받아먹고 거기에 개는 무언가를 찾아 먹었다. 언뜻 보기에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안락하게 사는 이곳의 개가 나아 보이지만 아니다. 그곳의 개들은 늘 본능이 숨쉰다. 더워서 쉬고 배불러 쉬고 그러다 다시 킁킁거린다. 길들려 지지 않은 게, 그 개들에는 있었다. 지중해의 개들의 시간이나 조르바나 뫼르소의 시간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종(種)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지배를 받는 종(種)의 보편성을 감안한다면 둘은 같다. 지중해 인간.
그러니 조르바와 뫼르소는 우리와는 다르지만 그 둘은 다른듯보일뿐 다르지 않다. 여자를 보며 욕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에 솔직한, 그들은 같은 종(種)이다. 그럼에도 내가 더 현실적으로 느끼는 것은 <이방인> 뫼르소의 삶이다. 개망나니 같은 삶의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의미를 선사하여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남겨주는 거인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삶을, 나는 살 자신도 없고 그렇게 살면 나는 이 세계의 <이방인>이 되고 말 것이다. 조르바를 읽고 조르바처럼 당신은 살 수 있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사람들이 인생을 조르바처럼 살아야 해,라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이방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국 니코스 카잔차키스 역시 조르바처럼 살지 못한다. 그토록 행복에 대한 영감에 뜨거웠지만.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또 한 번 나는 비겁했던 것이었다. 나는 내 내부의 신성한 야만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았다. p.439.
내가 책을 읽고도 내 삶에 크나큰 변화가 없는 건 어쩌면 내가 내가 사는 이 세계 속에서 "이방인"이 되고자 하는 "조르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의 악마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이방인"이 될까 두렵다.
나는 소설 말미에 조르바의 초대에 불응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화자)의 그 심란함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러기에 카뮈 역시 사회 속에 거부된 <이방인>보다 사회를 거부하고자 한 <조르바>를 따라가지 못한 카잔차키스(화자)의 인간다움에 카잔차키스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했었다고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