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사회의 권리 개념에 관한 썰
아랍의 봄, 홍콩의 우산 혁명, 5월의 광주는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의 촛불이 꺼지지 않고 있고, 이 순간에도 미얀마는 뜨겁다. 민주화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중우 정치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민주정을 향한 인류의 발걸음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2500년 전 위대한 철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민주정을 지금도 갈망하며 고집하는 것이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선책임을 모르지 않는다. 인류의 발걸음은 정치 체제의 단순한 선택을 넘어서, 가치에 대한 재인식과 실천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아비샤이 마갈릿, 차선책에서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 ‘품위 있는 사회’를 제안한다.
품위 있는 사회, 가치에 대한 재인식과 실천을 위해 사회-원시사회가 아닌 근대 국가 및 사회제도-의 기원부터 살펴보겠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들은 저마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개인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연권을 가진다. 인간은 자연권에 대한 무한한 추구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사회 계약을 통한 막강한 국가, '리바이어던'을 필요로 한다. 비록 <리바이어던>이 당시의 종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근대 국가의 출발을 예언했다는 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사회와 다소 거리가 있지만,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맞바꾸면서까지 주체적으로 절대권력을 희망했다는 점에서는 홉스로부터 근·현대적 사회의 의미가 정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들은 불안과 공포에 내던져진다. 그것은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강자와 약자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뒤바뀔 수 있지만, 강자와 약자는 늘 존재한다. 즉, 강자와 약자는 모종의 기준에 따라 상대적 위치이므로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것처럼, 약자는 강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모종의 강한 사회 제도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강자는 사회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제도의 제약이 없다면 오히려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약자들이 힘을 합쳐 강자를 쓰러트릴 경우에 달라진다. 강자들도 약자가 될 위험에 항상 놓여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강자가 약자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강자는 자신이 이익을 가질 때는 강함을 부인하지 않지만, 자신이 손해를 입을 때는 강자임을 부인하는 양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강자와 약자 모두는 자신들의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을 위한 사회 제도를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구축된 사회 제도는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고정적일 수 없으며, 그래서 강자와 약자 역시 영원할 수 없다.
마갈릿은 "한 사회의 제도가 그 제도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욕당한다고 간주할 타당한 이유를 제공한다면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품위 있는 사회’란 사회의 제도 자체가 구성원들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욕이란 동등한 입장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행위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여기는 한 사람이 타인을 낮추어서 조롱하거나 비하할 때 당하는 사람에게 생기게 되는 감정이다. 동등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모욕감이 생기는 그 순간, 동등은 깨져버린다. 현실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사회는 없다. 무엇이 이러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사회 구성원에서 강자와 약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경계선은 점선이라고 하나 분명히 사회 안에는 늘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모욕을 허락하는 사회 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마갈릿이 말하는 품위 있는 사회는 단순히 모욕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품위 있는 사회는 그 사회 제도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정의한다고 단언하지 않고 그 가능성으로 권리의 침해에 대해 논의를 시도한다. 즉, 분배적 정의가 토대가 되는 평등한 세상이 품위 있는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품위 있는 사회를 논하기 위해 권리의 개념은 꼭 필요한 것인가? 그는 권리 개념이 없더라도 구성원들은 모욕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사회의 품위 여부를 규정하는 데 필요한 존중과 모욕 개념을 형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품위 있는 사회라는 가치의 재인식과 더 나은 사회로의 한걸음에는 동의하지만 ‘권리 개념 없이 모욕의 개념을 가질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고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는 권리 개념은 없고 의무 개념에만 기반한 사회로 버스 사건을 설명한다. 젊은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의무는 있으나 반대로 노인이 젊은이에게 자리를 요구할 권리는 없는 사회에서 노인은 모욕감을 가질까? 마갈릿에 따르면 ‘모욕감을 가진다.’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에서 노인은 존중을 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되는데(일반적인 이유), 버스 안에서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받지 못한다면 모욕감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구체적인 상황이 모욕감을 품을 원인이 됨). 정말 그러한 것인가? 설사 모욕감을 가진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타당한 것일까? 물리적 폭행은 모종의 감정을 품게 할 일반적인 이유가 된다. 우연히 옆집 남자와 말다툼 끝에 폭행을 당하는 사건(구체적 원인)은 구체적 감정을 가질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모종의 감정이 구체적 감정으로, 즉 불쾌감이 모욕감으로 변태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될지는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모든 감정을 다 소유한다. 중요한 것은 모종의 감정이 그 상황에 과연 타당하냐는 것이다.
모종의 감정은 일반적인 이유와 구체적인 원인이 만나서 명확해진다. 때로는 그것이 불쾌감이 되기도 하고, 모욕감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도취감이 되기도 한다. 인간 본성은 비교를 통해 종종 자신보다 잘 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시기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당한 감정이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를 들어 잘 사는 동창생 남편으로 인해 그녀를 시기하고, 자신의 남편을 미워하고, 상대의 언행으로부터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시기하고, 미워하고,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는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일반적인 이유와 구체적인 원인 결합하여 구체적인 감정이 생긴다.’는 마갈릿의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감정이 반드시 모욕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즉, 모욕감이 형성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감정은 타자가 아닌 개인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형법 제311조에 따르면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모욕죄 성립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적어도 모욕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불쾌와는 달리 제3자의 개입이 요구된다. 즉, 모욕이 개인의 주장만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은 명확한 권리의 침해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권리 개념은 모욕하지 말라는 의무를 정당화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먼저, 마갈릿의 동물 유비 예시를 그와는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겠다. 사회는 동물을 학대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동물들은 권리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은 학대를 저지르는 사람들과 그런 짓을 허용하는 사회에 대해 학대가 말하는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라고 한다. 즉, 의무 도덕에 권리 개념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도덕적 주체들로 하여금 학대는 나쁜 의도를 가진 행동이므로 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장기간 의무만 중시하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정당성이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효력을 잃은 정당성을 정당화된다고 할 수는 없다. 동물 학대가 나쁘지만, 권리 개념이 없다면 암묵적으로 학대가 용인되는 현상들은 충분히 생길 것이다. 또한 학대가 나쁘니 하지 말라는 내용만으로는 의무가 정당화되지 않는 것은 현재 영국, 미국, 한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동물 권리에 상응하는 동물법 제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노예 문제를 보도록 하자. 1890년대 프랑스 외무부 문서에 따르면 조선의 노비제 사회에서 법적으로 노비들을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비를 죽이더라도 유배형에 처해지나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뇌물로 무마되거나 주인이 고위 관리나 양반일 경우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나 그것은 노비를 죽이지 말라는 형식적 의무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노비들이 아무리 심한 대우를 받더라도 주인을 고소할 권리가 없었으며, 동시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방면을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리 개념이 없었던 조선 시대의 노비들은 주인에게 불쾌한 감정을 가지더라도 모욕감을 가지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의무 도덕에서 의무란 도덕적으로 강제력이 있는 규범에 근거하여 인간의 행위에 부과되는 구속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이익을 위해 법률적으로 보장받는 권리와는 다르게 대체적으로 의무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마갈릿의 주장과는 달리 의무에 기반한 사회는 권리 개념의 도움 없이 모욕의 개념이 형성될 수 없다고 본다. 법적 구속력과 권리 개념 없이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 존중(self respect)을 형성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들의 자유를 담보하면서까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자 했던 의도와는 분명히 상반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라는 가치를 희생시킬 때에는 적어도 자신들의 권리를 암묵적으로라도 인정받고자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목적의 도덕에 근거한 사회 역시 마갈릿의 관점을 재 고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목적의 도덕에서 인간이 가지는 특별한 위치,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사람다움의 권리이다. 의무 도덕에 근거한 사회이든 목적 도덕에 근거한 사회이든 그 여부를 떠나서, 권리 개념은 품위 있는 사회가 형성해야 할 모욕과 자기 존중을 형성하기 위안 필수조건이 되어야 한다.
자존감(self esteem)은 권리 개념을 가진 인간만이 주장할 수 있다. 조선의 노비들이나 미국의 노예는 무력했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에서는, 그들을 향한 주인들의 의무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나 주인들에게 요구할 그들의 권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감을 요구할 수 없으며 모욕을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갈릿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그는 조엘 파인버그의 "권리 개념과 결부되지 않는 자존감 개념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는 파인버그의 도전을 인본주의적 도덕 개념을 가진 사람이 권리 개념 없이 자기 존중이나 모욕의 개념을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인본주의적인 사람이라면, 권리 개념의 소유 여부를 떠나서도 충분히 자기 존중이나 모욕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글의 서론에서 사회 제도의 기원을 찾아보며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거론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익과 생존을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던져진다. 인본주의적 도덕 개념-법률의 강제성이 아닌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의지한 도덕적 규범-을 가진 인간들의 세상은 자연 상태와 흡사 다르지 않다. 과연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 의무와 도덕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가능한 것인가? 중우정치로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든 스승 소크라테스를 보며, 플라톤은 교육을 전제로 하지 않은 민주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이상국가를 그려낸 교육서 <국가>를 집필하지만, 후대 전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추어 플라톤의 꿈을 재단해 기형화된 현실로 실현시켰다.
대항해시대의 원정대는 꿈만으로 신대륙을 찾아갈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의 폐쇄공포 속에서 넘나드는 파도를 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원들의 꿈을 더욱더 강렬하게 욕구할 수 있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선원들의 꿈은 단순히 선원이기에 마땅히 치러야 할 의무가 아닌 선원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이익에 기반해야 한다. 인본주의적 도덕 개념을 가진 인간들이 권리 개념 없이도 자기 존중과 모욕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로 가기 위한 지성의 단련을 의미하는 것이지, 유토피아 같은 사회가 언젠가는 반드시 건설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갈릿이 권리 개념 없이 모욕과 자기 존중을 강조하고, 인본주의적 도덕 개념을 거론하는 것은 바로 '품위 있는 사회'의 ‘품위’ 때문이다. 품위란 강제나 구속이 아닌 개인의 지위에 맞는 행동을 취할 때 나오는 위엄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말하는 품위 있는 사회란 강제성은 없지만 뛰어난 도덕성을 바탕으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 배려하는 이상 사회를 뜻한다. 불이 불이 될 수 있는 것은 물이 들어가 있기 않기 때문이듯, 이상 사회란 이상적인 인간들로만 구성되어야 가능하다.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들 모두가 이익과 생존을 위해 전쟁과 같은 투쟁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의무만으로 조직된 이상 사회가 아니다. 제도라는 것은 이미 ‘권리와 의무가 혼재된 복합적인 유기체’와 다르지 않다. 제도는 끊임없이 성장하지만, 의무나 도덕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물론 품위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해 의무와 도덕의 비중이 높아져야 함은 당연하지만, 권리의 부재로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말하면, 존엄성과 자존감이 확보되며 모욕이 없는 품위 있는 사회 역시 권리 부여로만으로 만들 수 없다. 권리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결국 '품위 있는 사회'에서 권리, 의무, 목적은 모두 필수조건에 해당된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로 한걸음 내딛기 위해 품위 있는 사람들의 높은 도덕성을 제시한다. 인본주의적 도덕 개념을 바탕으로 권리 개념 없이도 서로 배려하며 모욕하지 않는 사회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지향해야할 사회임은 분명하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저마다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 제도 안에서 개인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자연 상태로 환원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권리와 의무 그리고 목적 어느 것 하나 소외받지 않고, 그 가치가 재인식되어 품위 있는 사회로 실천된다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내딛는 한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