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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Oct 05. 2024

병원에서

남성에 대한 단상(斷想)

남성에 대한 단상(斷想)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마도 저 노인이 아닐까 싶다. 노인은 병원 문 바로 옆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목을 기린처럼 쭉 빼고 있었다. 아마도 소파에 대충 걸쳐진 엉덩이와 등받이에 기댄 등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 같았다. 나는 어제 마켓컬리에서 주문한 킹 타이거 새우가 떠올랐다. 만약에 그 새우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 이름이 불렸다. 노인을 제외한 두 명이 고개를 들고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렸다. 내가 노인에게 성함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볼까, 하고 고민하는 찰나 노인은 손을 들었다. 마치 허공에 달려있는 손잡이라도 잡을 듯이. 데스크 간호사는 노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2번 진료실로 가시면 된다고 했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굽은 등을 폈지만, 직립보행을 시도하는 새우 같아 보였다. 걷는 게 몹시 불편해 보였다.

  2번 진료실 간호사는 문을 열고 진료실 앞에서 노인을 기다렸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에 그녀가 흰색 장갑을 끼고 있었더라면, 난 진료실 유리문을 롤스로이스 팬텀의 문짝으로 오해할 뻔했다. 그녀는 수년간 2번 진료실에서 저렇게 문을 열고 닫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문지기로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간호사는 문을 지키느라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노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기다리는 시간보다 그녀가 노인을 부축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녀는 노인이 진료실에 들어가자, 문을 닫으며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저 노인은 어디가 안 좋은 걸까?

  병원에 들어올 때는 몰랐다. 노인 한 명, 아이 한 명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나. 대기실에는 남자가 셋뿐이었다. 여자는 원무과 데스크에 앉아있는 간호사 한 명 그리고 2번 진료실 간호사 한 명. 무슨 피부과에 여자 환자가 없다니 의아했다. 물론 2번 진료실 의사의 성별은 확인하지 못했다. 1번 진료실 의사는 오늘 휴진이다. 이왕이면 젊고 예쁜 여자 의사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만두었다. 아무리 의사라도 여자에게 말하기엔 뭔가 찝찝하다. 제가 사실은... 어머. 안타까워라. 하지만 괜찮아요. 이런 대화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꼬마 아이는 말이 없다. 노인과 다르게 소파 안쪽까지 엉덩이를 집어넣고 앉았다. 그래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고, 무릎이 굽혀지지 않는 레고 피규어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불편하다거나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최신형 휴대전화가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는지 몰라도 조만간 우주까지 날아갈 것 같았다. 

  꼬마의 아버지는 아이가 로켓처럼 날아갈까 봐, 아이 옆에 찰싹 붙어서 축구 중계를 봤다. 병원 텔레비전은 소리를 잃어버렸다. 텔레비전 공주. 아마도 텔레비전은 꼬마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 데스크 간호사와 거래를 했을 것이다. 내 목소리를 가져가는 대신 저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해줘. 데스크 간호사는 리모컨의 무음 버튼을 누르고 ESPN을 틀었을 것이다. 남자는 한순간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랑이가 불편한 듯 바지 지퍼플라이 부분을 오른손으로 자꾸 잡아당겼다.

  텔레비전에서는 토트넘과 맨체스터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등번호 7번 손흥민이 골을 넣고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슬라이딩을 했다. 화면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토트넘과 아스널, 토트넘과 첼시, 토트넘과 리버풀, 토트넘과 맨시티, 토트넘과 뉴캐슬, 토트넘과 애버턴. 이건 더 이상 축구 경기가 아니다. 성공한 남자의 하이라이트(High-light)다. 텔레비전 앞의 남자는 하이라이트에 눈이 멀고 말았다. 그는 이제 안과를 가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남자는 목소리를 잃은 텔레비전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잃은 텔레비전 공주와 시력을 잃은 왕자의 사랑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에로물이다. 

  내 이름이 불렸다. 공주와 왕자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관람 끝. 2번 진료실 간호사가 문을 열었다. 노인은 일어나며 굽은 등을 다시 폈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노인이 고개를 숙이지 않더라도 인사를 한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노인은 단 한 번도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문밖을 나왔다. 노인 주변의 공기층은 다르게 움직였다. 서서히 느리게 그리고 원무과 데스크 앞에서 멈칫. 나는 무거운 밀도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2번 진료실에 들어갔다. 

  가까이에서 본 간호사는 꽤 젊고 예뻤다. 무슨 냄새인지 산뜻한 과일 향이 났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 더 맡아보고 싶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봤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만약 그녀를 병원이 아니라 클럽에서 봤다면 분명 말을 걸었을 것이다. 연락처가 어떻게 되죠? 그런데 이건 너무 올드하다. 아마도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야릇한 상념에 빠지며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2번 진료실 간호사는 이번에도 문을 닫고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문 앞을 등지고 섰다. 내가 의사의 선고에 놀라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뒤에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면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릴 테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인스타 아이디를 알려줄 게 분명하다. 귓속말로 아니면 메모로, 방법은 상관없다. 우리는 섹스를 한다. 그런데 혹시 노인은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았을까, 참 노인은 어디가 안 좋은 걸까, 하고 생각하는데 의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아니, 이럴 수가. 불과 십수 분 전에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물었던 말과 토시 하나 다르지 않다. 의사는 왜 똑같은 질문을 하는 걸까, 간호사는 의사에게 내 말을 전달하지 않은 걸까. 어쩌면 이들은 서로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는 분업화된 공장의 기계일지도 모른다. 데스크 간호사는 인사를 하고 병원비를 수납 받고, 2번 진료실 간호사는 문을 열고 닫고, 의사는 인사를 하고 간호사의 말을 따라한다. 그는 어쩌면 앵무새일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안녕,녕,녕,어떻떻. 기계도 고장이 난다. 그들에게는 대화가 필요해 보였다. 의사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헛기침을 했다.

  “머리가 많이 빠져서요.” 

  나는 앞머리를 살짝 들어 이마를 보여주었다. 침대에 누워서 팬티를 벗는 기분이었다. 남자관리사에게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는 것 같은 수치심이 올라왔다. 그가 내 가랑이를 벌리고 고환과 음경을 만지며 탈모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럴 거라면 대기실에서 커밍아웃 같은 걸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대기실엔 셋밖에 없었지만, 굳이 제삼자가 알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이제 저들은 나의 탈모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건 보건의료기본법 제13조의 명백한 위반이자, 내 고환과 음경에 대한 심각한 명예 훼손이다. 노출증 환자가 팬티를 벗어야만 발기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이마를 까는 순간부터 발기부전이 올 것만 같다. 나는 팬티를 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앞머리를 내렸다. 

  의사는 더 이상 관음증 환자처럼 훔쳐볼 필요가 없다는 듯 당당히 행동했다. 그는 무영등에 불을 켰다. 그리고 모낭 확대경으로 내 머리를 살펴보았다. 내 두피는 살인 사건의 증거물처럼 모니터에 확대되었다. 그는 사건 현장을 살펴보듯 샅샅이 훑어보았다. 혹시나 놓친 증거가 있을지 몰라 중간중간 사진까지 찍었다. 그 모습이 지친 형사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입 짧은 아이 같기도 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내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맛없는 반찬 앞에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듯이 말이다. 나는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건 오래된 빨래 비누에 샤프심을 찔러 넣은 것 같기도 하고, 아주 흉측하고 더러운 벌레의 털 같기도 했다.

  “탈모군요”

  의사는 냉소적으로 결론부터 말했다. 의사는 무표정하게 엄지손톱으로 자신의 턱수염을 문질렀다. 그 소리가 꽤 거슬렸다. 

  “정말 탈모가 확실한가요?”

  그는 미묘하게 웃었다. 나를 비웃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기회를 포착하여 기쁜 건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 그는 나의 뒷머리와 정수리 그리고 이마의 모공과 모근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1단계부터 7단계까지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탈모의 과정을 담은 그림이었는데, 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의 영토분쟁처럼 보였다. 이마는 초원을 사막화시켰다. 머리카락은 초원을 지키기엔 무력해보였다. 결국 승리는 이마였다. 의사는 2단계와 3단계에서 고민하다가 2단계를 짚었다. 

  “전형적인 남성형 탈모입니다. 탈모는 2단계 정도 진행되었고요. 흔히들 M자 탈모라고 부르죠.”

  나는 최근 들어 머리를 감을 때마다 한 움큼씩 머리카락이 빠졌다. 하지만 직계 중에는 대머리는 한 분도 없었다. 나이가 든 집안 어른들은 머리가 새하얗더라도 번쩍번쩍하진 않았다. 오촌 아재 중 한 분이 계셨지만 그 어른도 육십이 넘었다. 그런데 고작 서른일곱인 내가 탈모라니, 의사의 진단만으로 탈모가 될 수는 없었다. 이제 본질보다 현상이 더 중요해졌다. 나는 법정 다툼처럼 유리한 증거를 가지고 탈모가 아님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팬티를 내리는 것조차 두렵지 않다. 당장에라도 바지를 벗고 그 앞에서 드러누울 수 있었다. 똑바로 확인해 보라고 가랑이라도 벌릴 수 있었다. 나는 이마를 까면서 말했다. 

  “선생님, 저는 고등학교 때도 이마가 이렇게 넓고 M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때부터 탈모가 서서히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면서 엄지손톱으로 턱수염에 문질렀다. 그 소리가 시주를 받으러 온 땡중을 마당에서 쫓아내는 빗질처럼 들렸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고등학생이 무슨 탈모입니까, 그런 게 가능하긴 합니까?”

  “실제로 인간의 성장은 빠르면 십대 후반 늦어도 이십대 후반에 마무리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노화지요. 아쉽지만.”

  말로만 들었다, 이십대 후반부터 인간이 늙어간다고.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은 늘 자위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너네는 어제도 바닥에 쌌지? 남자 고등학교였으니 망정이지, 남녀공학이었으면 신문에 날 일이었다. 그때 그 선생님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네는 바닥에 싸지만 나는 아니야, 라는 그 자부심 가득한 남자의 눈빛. 테스토스테론. 남자에게는 동경할 남자가 필요하다. 그는 우리의 테스토스테론을 늘 자극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황무지 같은 바닥이 아니라 밀림의 신비로운 샘물을 발견하리라. 사실 그 선생님은 추남에 가까웠다. 얼굴은 버려진 공터의 축구경기장을 떠올리게 했다. 몸은 드럼통에 가까울 만큼 조형미를 상실한 기계 부품 같았다. 그럼에도 눈빛이 살아있었고, 우리는 그 눈빛을 동경했다. 그런 그는 수업을 마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이십대 후반부터 늙어가. 그때 선생님이 하나를 빠트렸다. 이십대부터 머리가 빠질 수 있다는 걸.

  “그럼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노화가 시작했단 말씀인가요?”

  의사는 신체의 모든 기관이 동시에 노화의 레이스를 시작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탈모는 무엇보다 유전적 요인이 크지만, 형제 사이에도 똑같을 수는 없다. 그건 정말 운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러나 저라나 내가 탈모라는 그의 변론에는 틈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빠졌는데도 2단계인 걸 보면, 내가 어릴 적에 머리숱이 많았던 것 같았다. 하긴 어릴 때 가마가 없다고 친구들이 놀렸었다. 장가 한 번 못 간다고 말이다. 

  숀 코네리, 게리 올드만, 멜깁슨, 주드로, 정우성, 이정재. 의사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가 뱉은 이름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연기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들이 탈모이든 M자 머리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학창 시절의 볼품없었던 대머리 교장선생님이 번뜩 떠올랐다. 그리고 오락실 게임의 철권 헤이아치. 백설공주의 일곱난장이, 명탐정 코난의 브라운 박사, 원펀맨의 사이타마. 나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대머리 만화 주인공이 현실적이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2번 진료실 간호사를 떠올렸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진료실에 들어올 때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에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보며 우리는 섹스를 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었다. 지금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마디정도 해줄지도 모른다. 환자분 괜찮아요. 머리카락 좀 빠지면 어때요, 충분히 섹시해요.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고 아무런 말이 없다. 백설공주는 일곱난장이를 귀여워했지만 결국 왕자랑 섹스를 한다. 현실은 냉혹하다. 나는 2번 진료실 간호사가 자동문이 되어가는 상상을 했다. 

  “우선 약을 먹어 봅시다.” 

  의사는 나에게 먹는 약과 바르는 약 그리고 DHT, 5α-환원효소, 테스토스테론에 대해서 설명했다. 

  “안되면 모발이식도 있어요. 제가 손재주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의사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손을 비비는 소리는 턱수염을 긁는 소리를 증폭시킨 것 같았다.

  “머리를 심으면 약은 안 먹어도 되나요?”

  의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머리는 한여름의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자란 잡초 같았다. 의사가 약을 먹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런 걸 묻는다면 상당히 기분 나빠할 것 같았다.

  “뒷머리는 잘 안 빠져요. 그걸 뽑아서 모판을 만듭니다. 그리고 앞이마나 정수리에 옮겨 심어요. 모내기죠. 그런데 무한정으로 옮겨 심을 수가 없어요. 모량이 한정적이라. 만약 약을 안 먹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마의 머리카락이 도깨비 뿔처럼 남고 나머진 다 빠지겠죠?” 

  의사는 종이에 그림까지 그리면서 설명했다. 그는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종이를 들어서 간호사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미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아주 못 그렸지만, 어떤 느낌을 표현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일본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일본식 변발이었다. 앞머리와 후두부에 있는 머리를 제외하고, 정수리 머리만 민 촌마게를 연상시켰다. 어쨌든 그는 그런 느낌을 설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탈모를 일으키는 5α-환원효소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어요. 1형이랑 2형. 형제는 아니고요.” 의사는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드는지 소리 없이 또 웃었다. 의사 머리 위에 버려진 운동장에 바람 부는지 잡초들이 흔들렸다.

  “우선 1형을 억제하는 피나 계열부터 먹어 봅시다. 효과가 없으면 1형과 2형 모두를 억제하는 두타 계열을 먹어 보면 됩니다.”

  “그럼, 탈모는 멈추는 건가요?”

  “대체로 그렇긴 한데 약발을 받는 게 사람마다 달라요. 한 6개월을 먹어 보면 압니다. 우선 1달 치를 처방할게요. 복제약도 있는데 오리지널로 드세요. 비용이 부담스러우면 복제약도 괜찮아요. 현대 제네시스냐 벤츠 S클래스냐 차이거든요. 약 드셔보시고 다음 달에 뵐게요.”

  “그냥 6개월 치를 주시지 않고 왜 1달 치만 주시나요?” 의사는 꽤 지쳐보였다. 원래 나는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편이다. 그건 내 탓은 아니다. 난 다만 궁금한 걸 참지 못할 뿐이다. 

  “아, 그게 부작용이 있어요. 드셔보시고 계속 치료를 하실지 마실지 결정하셔야 하거든요. 이게 성욕 감퇴, 발기부전, 정액 감소 같은 성기능 장애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부작용이요?” 나는 그가 왜 부작용에 대해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 당황스러웠다.

  “아, 2~4% 정도 밖에 안 돼요. 대부분 심리적 요인 때문이고, 약을 끊으면 원래로 돌아옵니다. 대신 머리는 무조건 빠져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혹시 결혼하셨어요? 결혼은 안 하셨군요. 그러면 파트너가 있습니까?” 

  “무슨?”

  “섹스 파트너요.” 

  “네. 있습니다.”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위를 외줄타기하고 있었다. 양손에는 탈모와 발기부전이란 균형 봉을 들고서. 어느 쪽으로 넘어져도 하나는 잃게 된다. 여자는 덤으로 잃게 되는 게임이다.    

  의사는 1달치를 처방해주었다. 약을 먹으면서 파트너와 함께 부작용을 체크해 보라고 했다. 나는 뭐가 감사한지 모르면서 인사를 했다. 오히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단순히 머리카락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자로서의 무언가를 거세당한 것 같았다. 샘물 앞에서 묵직하게 부풀어 오르던 꿈을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심장 고동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는데, 어떤 형체가 어렴풋이 움직였다. 의사가 턱수염을 만지던 손으로 들어 문을 가리켰다. 빗자루 같은 손이었다. 

  간호사는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역시 예사롭지 않고 아주 능숙했다. 정말 그녀는 자동문이 되었다. 

  나는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천천히 그리고 원무과 데스크 앞에서 멈칫. 1달치 처방전을 결제했다. 만 오천 원. 그때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고, 꼬마의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체형에 맞게 주문 제작한 듯한 카키색 팬츠에 네이비 폴로 드레스 셔츠를 단정하게 넣어 입고 있었다. 앉아있을 때와는 달랐다. 꾸준히 운동을 했는지 군살이 없어 보였다. 그는 진료실로 성큼성큼 걸었다.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잘 손질된 알든 구두는 그가 얼마나 성공한 남자인지 과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풍성한 곱슬머리는 유독 그를 돋보이게 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처럼 근사했다. 

  그에게서는 테스토스테론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주변의 공기층에 스며들었다. 공기층에는 잔금 같은 줄무늬가 윤슬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팬츠의 지퍼플라이 부분이 불룩했다. 그는 2번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이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윙크를 했다. 아이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2번 진료실 간호사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윙크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떠난 뒤 텔레비전은 더 이상 아무도 유혹하지 않고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약국에 도착하니, 그 노인이 약사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노인이 처방받은 약은 두통이나 코 막힘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에 심장이 아플 경우 반드시 약 복용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약사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노인은 다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처방전을 제출하고 의자에 앉았다. 노인의 머리는 황량한 사막에 가까웠다. 바람이 불면 모래만 흩날릴 뿐이다. 그런 노인이 탈모약을 먹을 일은 없다. 의사가 죽은 모근을 살릴 수 없다고 했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어쩌면 노인은 아직도 자신이 남자임을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닌 것 같아 피식 웃고 말았다.

  약사에게 약을 받은 노인은 새우등을 한 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갔다. 약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약사는 나에게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부작용이 심하면 약 복용을 중단하고 담당 의사와 상의하라고 말했다. 나는 1달 치 약값 오만 원을 결제했다. 발기부전, 정액 감소, 성욕 감퇴, 우울감, 가슴 통증 및 부종, 그 밖의 각종 부작용 그리고 처방전 만오천 원, 그러니까 일 년에 칠십팔만 원이 내 어깨 위에 무동을 탔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바람에, 쓸데없는 돈을 쓰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국을 나와 어기적어기적 걷는데, 편의점 안에 그 노인이 또 보였다. 그는 새우등을 하고 편의점 계산대 아래의 진열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나는 노인을 쫓아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는 계산대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담배를 사는 척했다. 그리고 저 노인은 어디가 안 좋은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노인이 말했다. 

  “편의점 총각, 이거 오구라 유나 콘돔 맞제?”

  노인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는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단번에 냈다. 육천 원. 노인은 왼손에는 흰 약봉지, 오른손에는 붉은 콘돔 박스를 들고 나를 빤히 보았다. 노인은 나에게서 눈을 거두기 전, 아주 미세하게 입술을 떨었다. 내가 그 노인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면 경련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히 엷은 미소였다. 누군가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미소는 아니었다. 아주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예수가 앉은뱅이를 걷게 했다던데, 노인이 갑자기 예수을 만나기라고 했단 말인가.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빈손으로 편의점을 나갔다.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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