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제주도 여행 II
여행이란 곧 설렘이다. 만약 설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의무적인 답사에 불과하다.
설렘이 가득한 여행일지라도 가끔은 사소한 일 때문에 깨지기도 한다. 흔한 바가지요금에서부터 맛집이라고 찾아간 곳의 음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관광 특수를 노린 얄팍한 상술에 눈살을 찌푸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어쩌면 믿었던 여행 메이트와의 트러블은 여행 내내 불편함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이러한 예측 가능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 길 위에는 무엇이 있기에 상상만으로도 이처럼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 제주 올레를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때였다.
제주 방언으로 "집에서 큰길까지 나가는 작은 길"을 뜻하는 “올레”
그 길을 걷다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 발걸음을 멈추고 흔한 생수를 마셔도 제주의 5월은 근사한 카페가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 카메라를 종류별로 챙겼지만 욕심이 과했던 탓인지 실수가 이어졌다. 디카의 메모리나 배터리를 빼먹는가 하면, 오래되어 낡은 필름 카메라 한 대만 들고나가는 어이없는 실수를저지르기도 했다. 핸드폰이 있었지만 그놈의 배터리는 왜 이럴 때면 더 빨리 닳아 없어지는지.
역시 기동성 좋은 작은 디카 똑딱이가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는 후회가 밀려왔고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의미 있는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예약한 맛집도 우리가 묵었던 반려견 펜션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운 좋게도 제주에서 만난 이름 모를 사람들 모두가 친절했고 그 흔한 바가지 상술도 없는 여행이었지만 연이은 카메라 실수에 풍경을 즐기지 못한 채 툴툴거리는 마음이 길 위에 있었다. 여행의 설렘을 뒤바꾼 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멋진 사진을 찍자, 예쁜 사진을 남겨야지, 흰둥이랑 아주 근사하게... 여행에서 남는 건 역시 사진뿐이니까! 이런 욕심 때문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즐거움이지 목표가 될 수 없는데, 나는 사진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토너먼트 경기로 만들고 있었다.
풀과 흙, 나무와 바람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는 흰둥이의 모습을 보면서
‘사진 찍으러 이곳에 온 게 아닌데…’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함께 보고 싶다는 것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흰둥이한테는 여기 제주로 오기 위해 타야 했던 1시간의 비행이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호기심 가득 제주의 풍경을 맡으며 즐거워하는데, 왜 나는 사소한 일에 툴툴거리고 있을까?
그래 걷자, 제주 올레를 우리 한번 신나게 걸어보자!
이 길 따라 걷는 순간을 내가 다~ 기억하면 되지, 뭐!
그렇지 흰둥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흰둥이의 표정이 온전히 내게 들어왔다.
이곳이 참 마음에 드는구나.
이 녀석 많이 신났네
누나, 여기는 돌도 참 신기하게 생겼어요?
바람도 엄청 부는데 코가 하나도 안 간지러워요.
반려견과 여행을 하다 보면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특히 제주는 주의해야 할 것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반려견 동반 여행지 난이도 상에 해당한다.
이동수단으로 비행기를 탈 것인지, 배로 이동할 것인지(선택의 여지는 있지만 둘 다 보통은 아니다)부터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숙박시설을 찾는 일까지, 만약 여행 기간이 성수기에 속한다면 예매 부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주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어서 아쉽게도 반려동물 출입을 제한된 곳이 많다.
반려견과 제주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출발 전에 출입이 가능한 곳이 어디인지 만약 내가 꼭 가고 싶은 곳이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지 여부를 반드시 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갈 곳이 너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상 밖에 멋지고 좋은 곳이 많은 지역이 또한 제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식구들이 밥을 먹는 등 피치 못할 때에 흰둥이는 차 안에서 쉬거나 잠을 잤다. 계절이 5월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함께 올레길이나 주변 산책을 먼저 하는 것으로 흰둥이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고맙게도 5월 제주의 봄은 그런 아쉬움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우리에게 멋진 풍경을 안겨주었다.
돗자리와 간편한 그늘막만 있다면 한적한 해변에 자리를 잡고 한두 시간쯤 앉아 쉬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올레를 걷다 나무 그늘 아래 쉬어 준비해 간 도시락을 까먹는 일도 좋았다. 별로 한 것은 없는데 특별한 추억을 안겨준 제주의 자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와~ 파랑새다
누나, 파랑새예요!
행복이 어디 있나 궁금했는데
여기에 있었네요.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보니 역시 아쉬운 건 사진이었다.
사진을 조금 더 찍었다면 이런 아쉬움이 남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아쉬움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설렘으로 시작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으로 끝나버리는 게 여행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