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길어 보이던 추석 연휴가 꿈처럼 끝나버렸다.
모처럼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가족을 찾아 나서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느긋하게 집에서 휴식을 보내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긴 연휴를 보냈을 것이다. 또는 묵묵히 자신 앞에 주어진 길을 그저 걸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연휴는 나에게 흰둥이와 함께 떠난 특별한 제주도 여행으로 기억된다.
2011년 그해 5월, 가족의 달 황금연휴를 맞아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7년 동안 흰둥이와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지만 제주도는 처음이었다. 기존 여행과 단 하나 달랐던 점은 비행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과연 흰둥이가 비행기에서 잘 있어 줄지? 혹시 두렵고 무서워하는 것은 아닐지? 내 욕심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흰둥이가 케이지 포함 5kg을 넘지 않으면 기내에 함께 탈 수 있으니 고민할 거리가 조금은 가벼워졌을 텐데, 케이지 없이도 흰둥이의 몸무게는 7.8kg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한참 날씬한 시절이었구나...)
며칠 고민하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함께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반려견 동반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각 항공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반려동물 반입규정에는 편당, 기내와 위탁 수화물로 탑재가 가능한 동물의 수가 정해져 있다. 이는 자칫 우리보다 먼저 반려동물을 위탁한 사람이 있다면 함께 그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항공권을 예약하고서 케이지를 주문했다. 1시간 남짓의 비행이지만 나름 편안하라고 조금 큰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실수였다. 다녀와 느낀 것은 케이지는 꼭 맞는 편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 반드시 케이지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 흰둥이를 살펴보니 케이지 안에 깔아준 패드와 담요가 한쪽 귀퉁이에 뭉쳐 있었다. 이륙과 착륙 시 움직임이 있을 때 놀라 발버둥을 쳤던 모양이다. 케이지가 크고 미끄러우니 그 안에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래서 낯설고 불안한 장소에서는 크고 편안함보다는 아늑하고 안전감이 있는 편이 더 좋을 듯싶다.
여행 당일, 비행기 출발 2시간 전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게 했다. 눈에 잘 띄게 케이지 한쪽에 비상연락처를 적어두고, 안쪽엔 담요와 패드, 좋아하는 인형과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넣어줬다.
흰둥아, 조금만 참아?
우리 흰둥이 비행기 잘 탈 수 있지?
누나가 양말 넣어 줄 테니까 냄새 맡고 기다리고 있어.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시원하고 좋은데
여기 바닥에서 자면 안 돼요?
흰둥아, 이제 들어갈 시간이야.
집에서 훈련한 대로 잘 기다리고 있어.
우리 1시간 있다 만나자!
싫은데...
누나가 저기다
양말 벗어던지는 거 아까 다 봤는데
냄새나게-
- 잘 부탁합니다.
- 잘 부탁드려요.
- 놀라지 않게 잘 내려주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흰둥이 케이지를 받아 든 직원에게 부탁의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안심하라며, 걱정 말라며 친절하게 대해주셨지만 나도 모르는 불안함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차에 도움을 받아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
지상에서라면 한나절 걸릴 여행을 눈을 아주 조금만 움직이는 것으로 끝내버릴 수 있다...
알래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누구는 인생의 큰 해방감을 주는 이륙의 순간이라지만 걱정이 함께 붕~ 하고 떠오르는 것을 나는 무시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의 비행은 빨리 지나갔지만 공항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수화물이 레일을 따라 흐르며 여행자의 품에 안겨 떠날 때까지 나는 흰둥이를 볼 수 없었다.
비행이 끝난 후 30~40분 정도 지났을까? 흰둥이가 담긴 케이지를 들고 항공사 직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만남이 그렇게 반가웠던 적도 드물었다.
흰둥이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금세 평온을 찾았고 인생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시원한 물을 주고 눈가에 젖은 털을 닦아 주었다.
많은 사람들과 수없이 뒤를 따라 굴러가는 여행 캐리어들 사이에서 흰둥이는 낯선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제주도야.
이제 실컷 냄새 맡을 일만 남았어.
가족들이 식사할 동안 나는 흰둥이와 식당 주변 바다를 돌아보았다. 함께 식사하거나 체험할 수는 없어도 제주엔 보고, 듣고, 냄새 맡을 길들이 무수히 많았다. 눈에 보이는 풍경마다, 코에 닿는 냄새마다 신기하고 궁금하다는 듯 흰둥이는 제주도 그 길 위를 걷고 있었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여행을 계획하기 전 흰둥이 예방 접종을 마쳤고, 출발 열흘 전엔 외부기생충 예방도 끝냈다. 인식표가 달린 목걸이를 걸고 하네스를 찬 채, 이제 제주의 아름다운 길을 신나게 걸으면 되었다. 맑은 하늘 아래 제주의 길들이 흰둥이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