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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마킹 챔피언

2012년

by 모레


나무가 쓰러졌어요.
나 때문에 죽었나요?
미안해 나무야.



흰둥이 너 어젯밤에 복분자 마셨구나.

아직도 안 끝난 거니...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안에 집에 가긴 틀렸어.


가로수나 전봇대, 기둥이 길게 늘어선 산책길을 만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킁킁킁- 냄새를 맡고, 요리조리 자리를 살핀 흰둥이는 이내 자세를 잡는다.

최대한 한쪽 다리를 높게 들어 가로수 기둥에 영역표시"마킹"을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한번 시작된 마킹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아직도 나올 소변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때쯤 흰둥이의 마킹을 자세히 보면 겨우 한 방울 '찔끔' 떨어질 때도 있다.

나오지도 않는 소변을 왜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계속 반복하는 걸까?


놀랍게도 강아지는 방광에 모인 소변으로 한 시간에 최대 80번까지 마킹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가다 서서 마킹만 80번을 할 기세인데 산책이 끝날 때까지 다리에 힘이 남아있을지 걱정이다.



마킹(marking)이란 소변으로 주위에 흔적을 남겨 자신의 활동영역을 표시하는 개의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은 주로 4개월 이상의 성견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인데, 영역 의식이 강할수록 더 높은 곳에 마킹을 한다. 다른 개들에게 자신의 몸집을 크게 강조하기 위해 최대한 다리를 들고 높은 자리에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다.

개는 소변의 체취만으로 어디에서 왔는지 냄새의 방향뿐 아니라, 상대 개의 크기와 성별, 나이와 성격, 그리고 건강 상태까지 알 수 있다. 수컷의 경우 냄새를 통해 상대가 강하거나 약한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며, 마킹으로 체취를 남겨 주변 암컷들에게 자신의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것은 수컷뿐 아니라 암컷에서도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마킹은 단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우월성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개들은 마킹으로 남겨진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직접적인 만남 없이도 소통과 교류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문자를 통해 의견을 남기듯 개들도 마킹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셈이다.


나는 오늘 냠냠이를 한 개 먹었어.
누나가 밥 안 먹는다고 하나만 먹으래.
순간 울컥해서 으르렁거릴 뻔했어.

너는 어떤 냠냠이를 먹었길래
이런 고약한 좋은 냄새가 나는 거니?
나도 그 냠냠이를 먹어보고 싶다.



이것이 가능한 건 뛰어난 개의 후각 능력 덕분이다.

코 안 후각 상피의 넓이와 후각세포의 개수로 냄새를 맡는 능력이 결정되는데 약 500만 개의 후각세포를 지닌 인간에 비교해, 개는 보통 2억 개에서 많게는 30억 개의 후각세포를 가지고 있다. 단지 냄새를 포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냄새를 구별하는 능력은 인간의 100만~1억 배에 이른다.


이러한 능력으로 경찰견, 마약탐지견, 재난재해 구조견, 산악구조견 등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을 구조하는 인명구조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뿐 아니라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연구소에서는 주요 목재 문화재 10곳에 목재 문화재 훼손의 주범 흰개미를 찾아내는 탐지견이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의료분야에서도 개의 후각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야마가타 현의 작은 마을에서는 "암 탐지견"에 의한 암 검진을 실험하였고 정확도 99.7%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개들은 후각을 이용해 많은 분야에서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나이가 들면 시각과 청각 등 대부분의 감각은 퇴색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후각만은 노견이 된 이후에도 높은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개에게 코는 제2의 뇌이자 심장이다. 다른 감각이 퇴색하고 노쇠해졌어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그들의 뛰어난 후각을 위해서도 산책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아직도 산책 시 마킹을 단순한 배뇨라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그들의 마킹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중요한 개들의 정보가 담긴 하나의 소통 창구이며 일종의 "좋아요"를 부르는 자신의 매력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상대의 정보를 냄새로 취득한 후 자신의 것으로 원래 남아있던 다른 개의 냄새를 지워 버린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을 선점해야 내 정보가 담긴 마킹 표시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 많은 개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는데 간혹 물구나무를 서는 자세로 마킹하는 개들도 있다고. 개도 우리와 같은 사회적 동물이다.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체취를 반드시 남기는 것은 "좋아요"를 위해 좀 더 좋은 각도와 조명을 찾아 셀카를 찍는 사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다리가 짧은 흰둥이는 상대적으로 마킹 포인트가 낮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다리를 높이 들어도 보통 강아지들의 절반 높이. 사람으로 치면 셀카를 못 찍는 사람, 일명 '셀카 고자'와 같은 셈이다.


불쌍한 녀석-
너의 짧은 다리로는 아무리 열심히 마킹을 해도
금방 다른 강아지의 마킹으로 지워져 버릴 텐데...
그렇게 힘들게 다리를 들 필요까지는 없잖아 ㅠㅠ

흰둥아, 너 그러다 다리에 쥐 나겠다 ㅠㅠ


크하하하
나는 오줌 대마왕이다.



음,
방광이 꽉 채워졌군
이제 슬슬 저 숲으로 가볼까요.



키높이 신발을 만들어 줄 수도 없고, 마킹할 때 받치고 있는 한쪽 발이 벌벌벌 떨릴 때까지 자신의 매력을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흰둥이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짠하다. 그래, 세상의 모든 냄새 알림장이 우리 흰둥이 이야기로 가득차는 날까지 천천히 마음껏 마킹하라고 기다려줘야지.


앞으로는 마킹하는 너에게
빨리하라, 그만하라 재촉하지 않을게.

너는 모르겠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뿌린 너의 체취가
곧 누군가에 의해 지워질 거란 사실을.

불쌍한 우리 흰둥이
누나가 대신 그림으로 너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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