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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17. 2019

그렇게 선배가 된다.

사이코 패스 같지만 난 그녀를 이해한다.

보도자료 하나 쓰기 어려워서 끙끙거리던 게 어제 같은데, 내가 벌써 선배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처음 후배가 들어왔을 때, 걱정이 앞섰다.


'이제 내 앞가림 겨우 하는데, 내가 선배 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불안감이 치솟았다. 적응할 만하면 새로운 미션이 생기는 상황에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첫 후배는 6개월 단기 인턴이었다.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온 24살 풋풋한 여자 후배는 한눈에 봐도 이쪽 업계에서 버티기에는 숫기가 없었다. 나랑 눈도 못 마주치는 이 아이를 어떻게 기자 미팅을 함께 가나 싶었다. 어차피 6개월 있으면 떠날 사람, 굳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가르치고 적당히 칭찬하고 적당히 친해졌다. 6개월이 흐르고 인턴이 종료됐을 때, 후배는 나에게 장문의 감사 편지와 선물을 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감사 선물을 받았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미안하고 찝찝한 느낌.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도록 가능한 많이 가르치고 다독이고 했어야 했다. 비록 다그치는 꼴이라 내 진은 빠지겠으나 그게 본래 내 의무 아니었을까.


그 후로 난 5명의 신입과 2명의 경력직 후배 3명의 대리들과 일했다. 특히 5명의 신입 후배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과 열의를 가진 이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열정에 부합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얼굴 붉히고 못된 사람이 되는 거였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성장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배신하지 않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역할이란 것이 일처럼 열심히 한다고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더라. 그들을 보며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돼 도리어 미안했고 부족한 '나'임에도 믿고 의지하려는 모습에 감사했다.


후배에게 일을 시킨다는 건 그들의 교육시키는 거라며 자위했던 오만한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과 내가 함께 성장하고 있는 걸 발견하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억해라. 난 후배의 미래다.


지난 2월 3차 PT까지 해 마침내 수주한 고객사의 첫 행사였다.


오피스 이전을 기념해 언론, 내부 직원 그리고 파트너 회사를 대상으로 한 행사였다. 고객사와 손발을 맞추는 첫 행사인지라 첫 시작부터 녹록하지 않은 이벤트였다.


그래도 꽤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결과도 좋았다. 이제는 퇴사했지만 내 직장 생활의 근간이 된 이전 차장의 트레이닝과 빠릿빠릿한 능력 있는 신입 덕분이었다. 맞다. 후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누가 보아도 PR 에이전시에 오기는 아까운 스펙이었다. 영어 구사 그리고 디자인 감각까지. 셋 중 하나만 갖춰도 감사하겠다고 하는 스킬들을 그는 모두 가지고 있었다. 정점을 찍은 것은 그의 태도였다. 그는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함은 물론 그 어떤 신입보다도 선배의 말에 귀 기울이고 빠르게 업무에 반영했다.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편하고 그보다 좋을 수 없었다.


행사 전, 일이 터졌다. 준비한다고 했지만 나와 신입만의 리소스로는 역부족이었을까. 행사장에 설치해야 하는 테이블을 미리 고려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밤 10시가 되어서야 발견했다. 렌탈 업체를 컨택할 수도 없는 상황. 불행 중 다행은 회사와 고객사는 택시로 10분 거리였다. 결단을 내렸다.


‘그래, 3층 회의실에 있는 행사 테이블을 직접 가져오자.’


나는 후배를 데리고 회사로 복귀했다. 편의점에 들려 간단한 저녁 요기할 음식을 사고 복귀하면서도 내 휴대폰은 쉬지 않았다. 고객사로부터의 끊임없는 요청. 그는 날 안쓰럽게 쳐다봤다.


이동하기 전 간단히 컵라면을 먹으려 했지만, 난 먹을 수 없었다. 전화를 받는 사이 라면이 다 불어 어느새 볶음면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 안타깝게 바라봤다.


저녁을 포기하고 간이 테이블을 접어 택시를 불렀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콜택시가 겨우 잡혔고 테이블을 들고 택시에 옮기려 내려갔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접이용 테이블이 뒷좌석에 대각선으로 세워 넣어야 겨우 들어가는 게 아닌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사님은 좌석이 긁히니 조심해달라는 당부를 퍼부었다. 할 수 없이 그가 뒷좌석에 테이블을 받치며 몸을 구겨 넣었다.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겨우 세팅을 마무리하고 퇴근했다. 그때 시각 4시 30분. 내일 리허설을 위해서는 아침 8시에 나와야 한다. 사실상 거의 자지 못하고 오는 셈이다.


드디어 다음날, 행사 막바지에 다다르자 모두가 예민했다. 우리와 직접 일하지는 않지만 연관 있는 운영 부서 담당자가 와서는 미디어 기프트 위치를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매우 퉁명스러웠다. 꼭, 용역 직원이 된 것 같았다. 나조차도 그랬는데 그는 더욱 그러했을 터. 그는 힘없는 미소로 짐을 옮겨 나갔다.


행사가 끝났다. 모든 일이 끝났고 긴장도 풀렸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제오늘 그가 느꼈을 감정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불안, 우울, 무기력함을 느꼈겠지. 그리고 분명 실망했을 거다. 내가 그에게 보여준 모습에 대해.


밤 10시가 넘어 쉴 새 없이 고객사 전화를 받아야 하는 선배의 모습에.

밤 11시가 넘어 저녁을 먹어볼까 했지만, 고객사 요청에 라면 한 젓가락도 손대지 못한 선배의 고달픔에.

새벽 2시가 넘어 도둑질 마냥 접이식 테이블을 옮기며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해야 하는 선배의 고단함에.

새벽 4시가 넘어 퇴근하면서도 다음날 리허설 준비를 걱정하는 선배의 초조함에.

 

이 모든 역부족인 상황이 언젠가는 고스란히 자신이 겪게 될 거라는 것까지 그는 간파했던 거 아닐까.

행사가 끝나고 일주일 뒤, 그는 퇴사를 고지했다. 비단 이 행사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 주에 있던 역대 최악의 행사에 착출 돼 길바닥에 엑스배너를 설치한 것이 큰 요인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같은 맥락이다.


그가 본 행사장 속 나의 모습 그리고 과장들의 모습, 모두 하나 같이 역부족이고 힘든 모습들뿐. 어쩌면 나도 그도 어찌 됐든 ‘을’로 일을 쳐내게 되는 상황들뿐.


나는 좀 더 주어진 상황 앞에 합리적이었어야 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너무 맹목적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좀 더 생겨난 문제 앞에 현실적이었어야 했다. 모든 걸 해결하고자 무조건적으로 고민했던 건 아닐까.


잊지 말자. 내 판단과 고민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일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처럼. 

기억 하자. 내 현재의 모습은 내 후배의 미래다. 내 지금의 모습은 나만의 것이 아님으로.


스스로 나태하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기억해라. 난 후배의 미래다.





#사이코 패스 같지만 난 그녀를 이해한다.


한숨이 나온다. 후배가 내게 보고한 보도자료가 얼핏 봐도 줄 간격, 폰트, 양식이 창의적이다. 그녀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상 읽을 필요도 가치도 없으니까. 보도자료는 기업의 이슈를 언론에게 제공하는 자료다. 즉, 기업의 홍보 이슈를 가능한 기사화가 많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료 작성의 취지인 만큼 주어진 양식 준수와 가독성 디벨롭은 기본이다.


타오르는 분노를 한숨으로 잠재우고 후배의 보도자료를 출력한다. 어찌 됐든 피드백과 디렉션을 주는 것이 선배로서 나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리라. 겉모습과 양식에만 집중하는 꼰대는 되고 싶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하드카피로 나의 집중력을 끌어올려본다.


아뿔싸, 한 가닥 남아있던 나의 인내가 끊어졌다. 자료 중반에서 오탈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되다’ ‘돼다’ 같은 맞춤법이 헛갈리는 경우가 아닌 단순 오탈자였다. 퇴고를 한 번만 했어도 발견했을 법한 실수. 더 이상 그녀의 글이 읽히지 않는다. 예의가 없는 글.


분노를 손가락에 실어 메신저를 켰다.

‘00 씨, 내 자리로 오세요.’


그녀가 다가와, 필기구를 든 채 내 옆에 가만히 섰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컴퓨터 화면의 자기 자료를 보고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자료, 얼마 동안 썼어요?”

“고객사에서 내일 배포해야 한다고 오늘까지 초안 보고해달라고 해서요. 아직 프로모션 내용도 안정해졌는데 우선 써내라고 해서…”


동문서답의 대환장 파티가 시작됐다. ‘퇴고는 했니?’라는 물음을 나름 우회적으로 표현한 나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변명을 쏟아내는 꼴이라니. 차오르는 한 숨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어차피 프로모션이 확정되면 자료 내용이 수정될 거니까, 퇴고도 안 하고 오탈자 체크도 안 하고 나한테 일단 컨펌하라고 보낸 건가요?”


순간 사무실의 키보드 소리가 어색하게 들린 건 내 착각이길. 내 옆에 어색하게 서있는 그녀를 비롯해 멍하니 정적이 드리웠다. 정적의 무게가 부담스러워 마치 영화 인셉션 속 꿈이 깨질 때처럼, 타인들이 꿈속 주인공인 나만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날 보고 있지 않지만 날 보고 있는 시선들 때문에 눈 하나 깜빡하기 힘들지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 이겨내야 한다.


5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다행이다. 그녀가 말해주어서.


 사이코패스 같지만, 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

방금까지 이것도 자료라고 썼냐고 훈계를 해댔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


고객사는 프로모션 이름도 못 정했으면서 우선 보도자료부터 써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을 것이다. 속된 말로 쪼아대니 빨리 쓰기는 해야겠고 나중에 수정할 자료이니 그저 일을 쳐내고 싶었겠지. 매일같이 반복되는 을의 애환,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프로의 행동이 아니다. 프로는 주어진 행동에서 최대한의 효율(efficiency)을 내야 한다. 효율은 반드시 효과(effectiveness)를 전제로 한다. 효과 즉, 성과가 없는 기획서 혹은 자료는 그 전제가 어떠하든 필요 없다. 고객사한테 ‘너네가 자료 안 줘서 이렇게 밖에 못 썼어’ 라고는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녀를 자리로 돌려보내고 나로 인해 분위기가 서늘해진 사무실을 피해 1층 카페로 도망쳤다. 휘핑크림이 잔뜩 든 카페모카를 한 입 하려는 찰나, 카페 구석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2년 전 이맘때의 내가 한 손에는 빨간펜을 쥐고 자료를 퇴고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그 책상이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 사람. A 차장.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그녀는 내 자료를 항상 꼼꼼하게 피드백해주었다. 대리급으로 이직한 나지만, 처음으로 보도자료를 쓴 나에게 신입보다 더 신입 취급을 하며 호되게 일을 가르쳐줄 만큼 A차장은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내가 쓴 기획 보도자료를 13번째에 컨펌해주면서 건넨 말이 생각났다.


“르넷. 기획서가 어려우면 하나만 기억해요. 디테일이 전부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글도, 일도 똑같아. 디테일이 무너지면 기획서는 끝인 거예요.”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나름 자신 있게 쓴 글을 12번이나 퇴짜 맞은 분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컨펌을 받는 입장이어서였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야 알겠다. A 차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디테일, 그건 기본이니까. 이렇게 상사가 돼가는 걸까, 젠장.



어느새 얼음만 쨍그랑거리고 있는 빈 잔을 옆으로 두고 후배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녀에게도 지금은 듣기 싫고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그래도 필요한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다. 알고 있다. 미움받을 거다. 상관없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그뿐인 거다.


후배를 기다리며 날씨 앱을 연다. 저녁에 소나기가 올 거란다. 환기시킨다고 거실 창을 조금 열어놓고 왔는데, 역시 벌을 받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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