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이 독서의 끝이다 <14>
후지와라 신야. 여행 좀 좋아한다, 사진 좀 좋아한다 하는 사람중에는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즘 세대 친구들은 잘 모를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의 베스트셀러, <인도 방랑> 정도는 들어보지 않았을까. 1970년대초 나온 그의 첫 책으로 수많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인도로 향하게 만들었을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인도 방랑 이후 <티베트 방랑>이라는 책을 썼고, 그 다음으로 바로 이 책 <동양 방랑>을 완성했다. 소위 그의 방랑 3부작이라고 불리는 3권의 완결편격인 이 책을 나는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나는 후지와라 신야의 사진도 사상도 좋아하지만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방랑 시리즈는 아직 읽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후기에 낸 에세이집들만 주로 읽어봤기에 나 또한 늦깎이 입문을 하게 된 셈. 80년대 초반에 나온 오래된 책이지만 이번에 새로 개정판이 출간되어 이제 읽어볼때가 되었다.. 싶었다. 사실 표지에 적힌 글귀에 이미 나는 압도 당했다. 이것은 세상을 여행하며 내가 되 내이던 생각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의 책을 최근까지도 읽지 않았던 이유가 한가지 더 있는데, 나의 특이한 여행에세이 독서의 취향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자신이 가지 못한 장소의 여행기를 읽고 그 장소에 대한 상상을 키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의 여행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나의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나의 시선이 아닌 다른 이의 시선으로 그 곳을 바라보도록 고정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내가 안가본 곳의 여행기는 나에게는 조금 재미가 덜하다. 그만큼 내가 가보지 않은 장소임에도 흥미가 가도록 글을 쓰는 작가를 못만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미 다녀온 곳에 대한 여행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경우에는 조금 글이 부족하더라도 오히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이미 사진으로 담고 내 온몸으로 경험하고 하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가지고 있는 장소에 대해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또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이것만으로도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동양 방랑을 읽게 된 이 타이밍이 참 좋았다. 나는 이 책에 나온 대부분을 여행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이란을 거쳐 파키스탄, 인도를 지나 라다크에도 들렸다가 미얀마(버마), 태국을 지나 중국, 홍콩, 그리고 우리의 서울을 끝으로 일본으로 돌아간다. 모두 나의 시선으로 사진을 담았던 곳이었다. 나 또한 동양을 방랑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그의 사진이 궁금했다. 40년전 그는 이 아시아의 땅에서, 사람들속에서, 무엇을 찾아냈을까.
이 책에서 후지와라 신야가 동양을 여행한 시기는 1980년에서 81년이다. 37년전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오래된 여행기에는 어떤 표현할 수 없는 노스탤지어가 느껴진다. 그것이 내가 여행했던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보았던 그 풍경과 과거 그가 만났던 풍경의 극명한 차이들이 괴리감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그 간극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와중에 또 변하지 않은 모습들이 있어 반갑게 하기도 한다. 여행의 시작지였던 이스탄불의 낚시하는 사람들 모습이 그랬다. 2012년에 내가 본 모습과 같았다. 그가 보았던 것을 그가 보았던 곳에서 오직 30년 넘게 지난 세월 끝에서 나는 보았고 또 담았다. 수십년째 같은 장소에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조금 뭉클했다. 나는 그렇게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어 오랜 세월 자국을 만들어낸 곳들을 좋아한다. 깊이 눌려 가죽에 세겨진 흔적처럼, 그 오래된 삶의 이어짐을 좋아한다.
이런 풍경이 나의 고향 서울에서는 느껴지지 않으니 그것은 아쉬움이다. 신야는 서울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김’을 첫번째로 꼽았다. 여러 시장통과 포장마차들에서 음식을 하며 뿜어져나오던 그 김. 우리의 도시(일본)에서는 잃어버린 풍경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40년 가까이 지나 내가 이 글귀를 읽으니 조금 미안해졌다. 신야씨.. 서울도 그 풍경을 이젠 잃어버렸어요 하고. 아니 사실, 그가 바라본 81년의 서울과 비교하니 지금의 서울은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서울 여행기 초반부에 한강 앞의 건물들이 나지막해서 하늘이 잘 보인다고 표현한 것부터가 생경했다. 하늘을 보기는 커녕 그 거대한 그림자가 강을 가려버릴만큼 거대하게 솟아오른 이 빌딩 숲의 한강선을 바라보면 그는 어떤 마음이 들려나.
이스탄불을 떠나 동쪽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며 그는 배로 흑해를 건너게 되는데, 흑해의 색이 정말 ‘흑’색인지 궁금해하는 부분이 있다. 배가 흑해에 닿을때까지 설레여하며 자기 자신과 내기를 하다가 드디어 흑해의 색이 흑색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그 순간. 그는 어디론가 엽서를 보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흑해의 바다는 검다!’라고 한마디를 적어서. 이런 감정은 현대의 여행에서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항구앞에서 흑해는 무슨 색이지? 하고 누군가 반쯤 시큰둥하게 물어보았다면 바로 폰에서 검색 한번 해보고 아무 감흥없이 넘어가고 말았을 별 것 아닌 정보. 생각해보면 이 편리함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갈수록 재미없는 여행을 하도록 만들고 있는지. 나는 사실 여행할때 이런 이유로 너무 많은 조사를 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덜 유명한 곳들을 갈때는 일부러 사진도 잘 보지않는다. 내 여행속 놀라움의 감정을 지키고 싶어서. 때로는 그래서 당황하기도 하지만 그런 예상치못한 만남속에서 사진을 만나고 잊지못할 경험도 만들어진다. 미리 안다는 것은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먼저 알아서 좋은 것이란 다가온 시험의 정답 정도가 아닐까. 후지와라 신야는 모르기를 선택했기에 많은 것을 본 사람이었다.
티베트는 그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그는 말했다. 티베트의 푸른 하늘을 보고 세상 모든 하늘이 탁하게 보이는 병에 걸렸다고. 눈에 얼룩이 진 것처럼 그렇게 되었다고 말이다. 아, 나의 눈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그 표현에 크게 공감했다.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이 병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 푸른 하늘을, 별로 가득한 밤 하늘을, 그 노을을, 그 아침을 보았기 때문에 서울에 돌아오면 이렇게 시들어버린 꽃처럼 풀이 죽어버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글만큼이나 사진으로 유명한 작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그의 사진보다 글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사진에도 나의 존경을 담는다. 특히 그가 사진을 담는 마음가짐은 나의 사진 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은데, 이 책의 종반부에 들어서야 그는 자신의 사진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 한가지는 이 동양 방랑의 여정중에는 삼각대를 쓰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 그 이유로서 그는 삼각대는 기계의 다리지 내 다리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사실 나도 삼각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역시 큰 공감을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갈수록 요즘의 사진가들은 ‘흔들림’을 죄악시 하고 있다. 완벽하게 또렷한. 흔들림 없는 칼같은 한장을 얻기 위해 혈안이다. 나는 말하고 싶다. 흔들릴 자유를 허하라. 이 세상은 카메라를 잡은 우리 손의 그 작은 떨림처럼 쉼없이 흔들리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흔들림이라는 것이 사진이다. 이 책속에 수록된 많은 사진이 흔들려있지만 그것이 실패한 사진이라는 뜻은 아니다. 흔들린 사진도 좋다. 그 흔들림에 이유가 있다면.
그가 자신의 사진을 정의하는 단어로서 사용한 것은 ‘순시’이다. 순시는 눈깜빡할 사이라는 뜻인데, 오래 관찰하고 담으면 오히려 그 대상의 참모습을 놓친다고 한다. 눈깜빡할 사이에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더 그 본질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사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반가웠다. 많은 다큐 사진가들이 오래 관찰하고 지긋이 찍어야만 그게 더 ‘깊이’ 들어간 사진이라고들 주장하지만 나는 늘 거기에 반대해왔다. 난 오히려 직관의 힘을 믿는 사진가였다. 사진가는 자취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기에 신야의 사진론은 다시금 나의 사진에 힘을 주었다. 그는 순시하게 사진을 담았고 그 짧은 찰라에도 삶의 코앞으로 자신을 내달렸다. 책 말미의 장성일 소설가가 표현했듯이 그는 세상의 냄새를 맡았다.
조금 공감이 안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의 서쪽 이슬람권 사람들을 광물의 사람들이라고 하고 그들의 표정을 ‘분노’로 표현했다. 동쪽 아시아의 불교권 사람들을 식물의 사람들이라며 그들의 표정을 미소로 표현했다. 이런 구분은 나에게는 조금 와닿지 않았다. 천하의 그지만 이슬람 문화와 아랍 사람들에 대한 파악에는 조금 편견이 들어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혹은, 80년대 이슬람권의 모습이 지금과 그런 면에서 달랐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책의 마지막은 이런 동양의 나라들 사이에서 일본의 위치를 조망하는 이야기들인데 여기선 약간 일본인 특유의 과대망상이랄까.. 일본을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나라이기에 특별하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솔직히 그런 부분들은 큰 공감을 하지 못했다. 자기 나라라고 꼭 특별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물질적 ‘에테르’를 동양에 전파한 것 또한 일본인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서양에서 다 온건데 이것도 일종의 자의식 과잉이랄까. 뛰어난 작가도 ‘국뽕’은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했던 문장들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어느 나라를 가던 반드시 ‘창녀촌’을 방문하는 그의 여행 행태였는데, 요즘의 세상에서는 이제 만날 수 없는 여행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곳에 간 이유들이 있고 그의 철학이 있지만 요즘 세대의 사람들이 그만큼 이해심을 발휘해줄까 싶기도 하고. 그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시절을 여행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 늘 느끼는 감정이지만, 참 여행하기 좋을 시절 잘 만나서 여행한 사람들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그의 여행 방식이나 결론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책에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도.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도. 그냥 ‘이야기’만을 좋아해도 즐거울 것이다. 그는 분명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좋은 ‘이야기’의 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다. 여전히 사람은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사는지. 무엇이 행복하게 하는지. 무엇이 슬프게 하는지. 왜 화가 나는지. 인간에게는 인간이 가장 흥미롭다. 그가 책의 말미에서 밝히듯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보면 사람에 지치게 되는 ‘빙점’이 찾아온다. 사람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때가 말이다. 하지만 결국은 사람에게 돌아온다. 사람이 아무리 싫어져도 결국은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가 책을 쓰고 또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사람의 때가 잔뜩 묻어있기에 이 책은 읽는 재미가 있다. 종국에는 자신만의 ‘사람’을 안고 책을 덮을 것이다.
2018년 완독.
동양 방랑
-후지와라 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