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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Jan 21. 2021

확신하면 흐릿해지고, 고민할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Both Sides Now

[2012년, 22살]


군대라니. 대학생활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학회장 업무가 끝내고 겨우 이틀 뒤에 훈련소로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게 뭔가. 23개월 동안 갇혀 지내야 하는데 여행도 못 가고. 나를 기다려 줄 애인도 없다.


정말 큰 불만은 첫 사회생활이 비효율적이고 계급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에서 시작된다는 거다. 그건 불만보다는 불안이었다. “혹시 너무 잘 적응해버리면 어쩌지?”하는 불안.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생존하니까. 정신 바짝차리지 않으면 물들 것 같았다.


첫 경험은 누구에게나 강렬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만 4~5세까지의 경험이 성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이론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프로이트의 말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걸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앞으로 평생 사회생활을 해야할 텐데 이 문화에 적응해버리면 어쩌나. 더 큰 두려움은 사회생활 자체가 군대와 비슷하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절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최고참이 되어도 후임들을 시켜먹기만 하지는 말자고.


군대는 사회생활의 시작이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사회와의 단절이기도 하다.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빈 손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휴대폰이 없고 빈 시간이 많을 테니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고 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23개월로는 풀지 못할 아주 커다랗고 복잡한 질문을 가져가자. 심심할 때마다 떠올리면 되겠지.


그래서 생각한 질문은 이거였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로 가는가.


너무 큰가.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부터 답하기 까다롭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면 우리 부모님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계속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생명까지 공부해야 한다. 더 멀리 가면 빅뱅이론이 튀어나올 거다. 23년이 지나도 모를 문제를 23개월 동안 어떻게 섭렵하나. 게다가 질문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다.


번갈아 가며 고민해보자. 우선 진화론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고유한 나의 모습을 파악하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모습도 알아야 한다.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개인적으로’라는 수사를 붙이는 것만큼 무지한 일도 없으니까.


진화론을 배우면 사람들의 행동 패턴에 주석을 달 수 있다. 많은 의문이 풀릴 것이다. <지상 최대의 쇼>,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이 아무리 두꺼워 봐라. 사람이 움직이는 원리를 읽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다.


명쾌하다.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움직인다. 이 두 가지 프레임만으로도 많은 것이 설명된다. 물론 각론으로 들어가면 복잡다단하지만,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2021년, 31살]


진화론은 한동안 내가 사람과 세상을 보는 틀로 구실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심지어 실험으로도 증명된 이론은 매트로놈처럼 흔들리는 나에게 묵직한 중심을 잡아줬다. 그야말로 토대였다.


하지만 진화론에도 결점은 있었다. 복잡하고 불합리한 인간을 이해하기에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정말 이게 다인가 싶은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존을 전혀 돌보지 않는 무기력한 사람이라거나, 혹은 사랑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거나.


세상은 훨씬 복잡했고, 밖에서 보는 것과 직접 겪고 난 뒤의 감상은 몇 가지 단어나 프레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도 그랬다. 경험이 많은 40대 부사관은 장교에게 조언을 주는 위치에 있었고, 어떤 대위와 중사는 서로 존대말을 하는 친구 사이처럼 항상 붙어지냈다. 병사끼리도 친해지면 계급을 너머 허물없이 지내기도 했다.


계급 사회지만, 그 안에는 계급을 뛰어넘은 우정과 선의와 장난이 존재했다. 조금 더 높은 해상도로 세상을 보기 위한 틀이 필요했다. 요약본이 아니라 의미있는 체험이 필요했다. 하지만 겁 많고 걱정 많은 내가 일일이 체험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이야기의 세계에 빠진 건.


영화 스토리텔링의 구루 로버트 맥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란 의미있는 정서적 체험이라고. 일상에서 겪는 사건은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봤을 때 그 의미를 알 수 있지만, 이야기는 체험하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된다고. 


그러면서 아이러니에 대해 강조했다. 아이러니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렸는데 정작 내가 원했던 건 출발점에 있어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아이러니란 나를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성격이 나를 추락시키는 상황을 말한다. 아이러니란 승진도 하고 싶고 임신도 하고 싶은데 이 두 가지가 같은 날 이뤄져버린 상황을 말한다.


모든 훌륭한 이야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완벽하게 좋은 것도, 완벽하게 나쁜 것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파고 들면 거의 언제나 이면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이야기의 일이다.


직장 생활은 군대와 많이 달랐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반에 군대 문화가 깔려 있었다.


유아기 시절의 환경은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 생각에 갇히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스스로를 구축해나갈 수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명쾌한 논리와, 의미있는 정서적 체험이 모두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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