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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민 Dec 22. 2018

S#1. “사람은 판례를 남기면 안 돼.”

그런데, 2018년 9월 4일 판례를 남겼다.

1.     

 “사람은 판례를 남기면 안 돼.”


 대학 시절,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냐는 질문에 법대생이 된 친구가 남긴 대답이었다. 이것저것 배운다고 이야기하며 ‘판례를 남기는 소송의 피로감’을 말한 것인데, 앞뒤 이야기는 모두 잊고 저 말만 기억에 남았다. ‘사람은 판례 남길 일을 만들면 안 돼! 상당히 피곤한 일이거든.’


 2018년 9월 4일, 판례를 남겼다. 2017년 5월 발생한 사건이었고, 12월 법원에 소장 접수를 했으며, 2018년 6월 첫 재판이 있었다. 재판을 기다리며 나는 가만히 있다가도 화가 나고, 시도 때도 없이 내 권리를 주장하는 발언을 했으며, 술도 많이 마셨다. 덕분에 살도 많이 쪘고, 난생처음 건강검진에서 간 기능 재검사 안내를 받기도 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괜찮지 않았다. 판례 남기는 그 피곤한 일을 하고야 말았으니 몸이 멀쩡할 수 없었다.




2.


제주도 서귀포시에 자리한 ‘유동커피’ 벽면에 걸린 네온사인.              

 대학 졸업한 지 10년이 훌쩍 지나, 하루하루 그럭저럭 살아가던 30대 중반의 어느 날이었다. 20대 때 인디 뮤지션으로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는데, 음반 제목인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을 국내 유통 대기업이 자사 보도자료에 무단 사용한 것이었다. 그전부터 이 문장을 많은 곳에서 출처 없이 쓰고 있긴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제주도의 한 카페(제주도 서귀포시 '유동커피')에 문의해 보니 내가 만든 노래가 힘든 시절 위로가 되었고,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이 담긴 카페를 창업하며 한구석에 이 문장을 네온사인으로 제작해 걸었다고 했다. 문장에 공감한 손님들이 SNS에 올려 유명해진 것이다. 내 노래를 좋아해 주었던 팬이었다. 많지 않았지만, 싸이월드와 라디오 덕분에 내 노래를 즐겨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로와 응원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음악이기에 지금껏 기억해 주어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 지하 2층 벽면에 걸린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라는 문구의 네온사인.

 그런데 그 대기업은 아니었다. 창작자인 내가 누군지도 몰랐고, 문장이 어디에서 처음 쓰였는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그 카페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매장에 네온사인을 걸면서 카페에 문의조차 없었다. 매장에 네온사인으로 걸린 문장을 보기 위해 그 대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에 갔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지하통로 상품 매대 뒤로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가 눈에 들어왔을 때 내 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화가 났다. ‘불쾌하다, 기분 나쁘다, 속상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이 문장은 내 20대 시절을 담은 표현이자 사상이었고, 지금까지도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게다가 대기업은 보도자료에 ‘이 문장을 자신들이 제공한다’는 표현까지 썼다. ‘제공’의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제공 : 무엇을 내주거나 갖다 바침’.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3.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 판례를 남기지 말라고 했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변호사가 된 친구는 흔히 말하는 대형 로펌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렇게 친구 덕 좀 보나 싶었다. 그런데 내 친구는 ‘중재’ 담당 변호사지 ‘저작권 전문’ 변호사가 아니었다. 즉, 나의 화나고 답답한 상황은 알겠으나, 저작권 소송 경험이 있어 답변을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20대 시절 맨땅에 헤딩하며 음반 만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같이 분노했고, 자기네 회사 저작권 전문 변호사에게 물어봐 주겠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저작권 전문 변호사는 쉽지는 않겠지만, 최초 창작자로서 권리를 주장해 봐도 좋겠다고 했다. 나는 내 사건을 대형 로펌에 맡겨 봐야지 생각했다. 수임료가 아주 비싸겠지만, 대기업과 싸우려면 이 정도의 준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난생처음 재판을 준비하는 것이다 보니 변호사 비용이 얼마인지조차 감이 안 잡혔다. 우선 얼마인지 물어나 보자. 친구를 통해 대형 로펌에 사건 의뢰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미 해당 대기업이 대형 로펌 의뢰인이라 이해관계 상충으로 인해 나를 변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나름대로 엄청난 결심을 하고, 소송비용을 문의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맥이 빠져도 되나 싶었다. 앞으로 어쩌지. 






덧.

 어제 서점 구경을 하다가 개인소송 관련된 책에 눈이 가더군요. 2018년 연말을 맞아, 올 한 해 저에게 있었던 큰일 중 하나였던(가장 큰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일이 많았음.) 저작권 개인 소송에 대해 틈틈이 남겨보려 합니다. 아마도 2018년 내에 끝날 것 같지는 않고, 구정 전에는 마무리해 보고자 합니다.


덧2.

 ※ 본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브런치에 게시하는 이유는 저와 같이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저작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본 게시물을 보시고, 임의의 매체 및 저작권법 관련 강연 등에 활용하실 경우 반드시 사전 협의 요청해주시길 바랍니다. 판결문은 SNS 등을 통해 공개하였으나, 본 브런치에 소개되는 내용은 제 개인의 정보가 있어 보다 정확하게 소개될 수 있길 바랍니다. 사전 협의 없이 사용하다 적발되는 경우, 민형사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문의 : dearmothermusi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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