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기를 두들겼다. 선택안은 하나였다. 변호사 없이 개인소송 하는 것.
4.
지인 중에 그 대기업을 다니다 그만둔 사람을 찾았다. 다행히 한 명 있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떠한 구조와 분위기 속에서 대응할지 파악했다.
지인의 동기 중 재직 중인 이를 통해 본사 법무팀을 거쳐, 내 문장을 출처도 없이 가져다 쓴 담당자와 연결되어 연락을 나눴다. 몇 주에 걸쳐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다. 내 입장은 분명했다. 내가 직접 창작한 저작물이고 그것을 사용했으니, 저작물 사용을 인정한 후 ‘필요한 기간 만큼’ 사용하시고 그에 합당한 저작물 사용료를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현재는 나도 인디뮤지션이 아닌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가급적 이메일로 소통하자고 요청했고, 알겠다는 대답을 들었으나 결국 ‘이메일은 안된다.’는 답변을 받기도 했다. 그 대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에 걸린 해당 문장 네온사인은 몇 월 며칠 몇 시에 철거했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기도 했다. 이메일은 왜 안 되는 것이지? 그럼 그동안 담당자와 주고받은 카카오톡은 이메일과 무엇이 다르지? 이해하기 힘든 답변을 들었고, 내용증명이 오갔으며, 해당 매장 총괄하는 이가 담당자와 함께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 대기업에서 2명이 온다고 해서 나도 한 명 더 함께 나가겠다고 했다. 나 역시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같은 직장에 재직 중인 변호사에게 동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참고로 내용증명은 내가 직접 썼다. 그리고 변호사는 동석했을 뿐 내 입장은 내가 정리해서 전달했다. 내용증명 등 소송 전후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상황에서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방법과 태도, 그리고 변호사를 선임했더라도 저작권자 당사자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추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결과적으로 그들 입장은 ‘한 문장’이기 때문에 저작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문의한 결과(!!)라는 답변이 더해져 있었다. 허락 없이 자사 홍보를 위해 가져다 쓴 대기업도 어이없었지만,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답변도 당황스러웠다. 이 문장은 ‘음반 제목’일 뿐만 아니라, 음반 발매 이후 내가 쓴 ‘문학 계간지 칼럼의 제목’이기도 했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주최 행사 때 ‘수백 명 앞에서 한 강연의 제목이자 주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작물이 아니라고? 그럼 뭐가 저작물인데? 저작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5.
대형 로펌에 소송비용 문의 후 ‘이미 그 대기업이 클라이언트라 이해관계 상충으로 내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친구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변리사 자격증이 있는 변호사에게도 소송비용을 문의했다. 몇 년 전, 회사 업무로 상표권을 등록하기 위해 함께 일해본 경험이 있는 변호사였다.
그 변호사는 ‘저작권 침해 건과 관련하여, 법원은 문구 등이 창작적 표현인지 여부로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저작물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데, 비교적 짧은 문장의 경우 통상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며 승소 확률이 높지 않으니 속상하겠지만, 참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나를 생각하며 해 준 매우 솔직한 조언이었다. 만약, 소송하게 된다면 1심, 2심, 3심 각 500만 원이 들고, 승소하면 성공보수도 500만 원이라고 했다. 변호사 비용을 보니, 내가 운 좋게 1심에서 이겨도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손해배상비는 거의 모두 변호사 비용으로 나갈 것 같았다. 물론 피고인 상대방이 패소하여 원고인 나의 변호사 비용을 일정 부분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내가 추가로 얼마를 더 부담해야 할지까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방이 항소해서 2심, 3심으로 이어지는 경우 비용은 추가될 것이고, 혹시 내가 진다면 상대방의 소송비도 부담해야 하니,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이래서 다들 못 싸웠구나. 그제야 왜 내 사건에서 인용 가능한 최신 판례가 없었던 것인지 이해됐다. 피해 사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이 드니 소송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소송은 시간도 오래 걸리니, 전업 예술가 개인이 감당하기에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답답했다.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창작 활동을 이어가며 억울하고, 짜증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나만 해도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제작한 미디어아트 전시회가 영화제 개막식 당일 취소된 적도 있고, 내가 만들고 부른 노래가 인터랙티브 형식의 소주 광고에 사용되었으나 새로운 매체라는 특성으로 인해 나의 저작권은 인정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단념하는 것이 당연한 듯 지냈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창작자가 경험하는 상처였다. 만약, 이런 일이 20대 때 있었다면 또 한 번 속상해하고 어찌할 바 몰라 억울해하다 묻어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정도 불만은 사회에 던져 볼 수 있는 30대였다. 그냥 참고 넘어간다면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도 어찌할 바 모르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최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작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계산기를 두들겼다. 선택안은 하나였다. 내가 나의 변호인이 되는 것. 질 때 지더라도 내 소송비는 줄이는 것. 즉, 개인소송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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