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눈치 봅니다.
삶을 돌이켜보면 내 몸은 허약 체질이 아니었다. 가끔 계절성 감기가 걸리거나 잠을 많이 자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병치레는 없었다. 하지만 요 몇 년 전부터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고, 그리고 충분한 숙면을 취했음에도 하루 종일 피곤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드러누워 연신 피곤하다고 외쳤다. 나이를 탓하며 이 약 저 약 안 먹어본 약이 없고, 홍삼은 100 뿌리나 먹은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피곤은 짙어졌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전날 술도 안 마셨는데 마치 소주 3병은 마신 것처럼 숙취에 찌든 느낌이 들어서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몸이 완전히 맛이 갔네 갔어.’ 게다가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서 좋아하던 해외여행도 마다하고 옆 동네 놀러 가는 것조차 귀찮았다.
지난달에는 감기 기운이 있어 약을 일주일이나 먹었는데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머릿속에 희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감기는 바이러스성인데 어떻게 나았다가 걸리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지? 감기가 아니라 다른 병인 건가?’
마침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살면서 알레르기로 고생할 때마다 ‘지르텍’을 며칠간 먹고 괜찮아졌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얼른 동네 약국으로 달려가 '지르텍'을 사서 한 알 먹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감기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망할! 알레르기였네.’
감기 기운이 사라짐과 동시에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피곤함이 사라졌다. ‘어라. 그렇다면.’ 난 그 이후로 지독하게 겪던 만성 피로가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는 소망을 품고 '지르텍'을 매일 한 알씩 복용했다. 복용 전 약사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혹시 모를 부작용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하루 한 알씩 복용하세요. 하루 두 알 복용해도 효과는 두 배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부작용 확률은 두 배가 돼요.”
그렇게 매일 한 알씩 복용한 지 5일째 되던 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난 2년 동안 괴롭히던 만성 피로가 싹 사라진 것이었다. 피로엔 '우루사'라며. '우루사'는 3개월 내내 먹어도 피곤했는데, '지르텍'은 5일 동안 먹었더니 마치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처럼 에너지가 넘쳤다.
그동안 간간이 아프던 증세를 하나하나 곱씹어봤다. 초등학생 시절 시골 할머니 집에만 가면 가렵던 눈, 강아지를 쓰다듬으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재채기 지옥, 군대에서 이불을 터는 날이면 족히 삼일 동안은 끊어지지 않던 재채기, 3년 전부터 시작된 원인 모를 두피 여드름, 대학 1학년 때 극심한 의욕 상실과 피로로 그 한 해 동안 집에 누워만 있었던 일 모두 알레르기 반응이었던 것이다.
‘아, 열받아!’
이 발견은 마치 내가 우리 부모님 자식이 아닌 외계 행성에서 온 슈퍼맨이란 사실을 발견한 수준으로 놀라웠다. 늘 내 곁에 있었지만, 몇 년에 한 번꼴로 고개를 드는 탓에 눈치챌 수 없었던 내 병. 알레르기. 늘 내 곁에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기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약. '지르텍'.
알레르기 약 '항히스타민제'는 1950년대부터 알레르기 억제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 약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지금껏 고생을 안 했어도 됐네?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동시에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환희가 밀려온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약이었고, 심지어 알레르기로 몇 번 복용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오랜 기간 고생을 하는 동안에는 먹을 생각조차 못 했다. 분명히 이 약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해결책은 늘 내 주위에 있다. 주변의 누군가가 얘기해 줄 때도 있었지만 내가 일찍이 못 알아보거나 알아듣지 못했을 뿐. 약을 씹으며 주변을 세심하게 다시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