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가는 자
- 최진석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생각을 업그레이드 하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야한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다 버리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탄생해야한다. 거기에서 새로운 생각을 입히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행동을 하면 건너가는 자는 위버멘쉬가 된다.
최교수님 책은 정말이지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좋은 문구 발췌>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무엇도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성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그러한 성질인 것은 없다'라는 말입니다. 즉 본무자성이라는 말을 기호로 나타낸 것이 공입니다. 무엇도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성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없는 것에서 무언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잠시 관계를 맺고 얽혀 있을 뿐이라는 말이고요. 다시 말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은 없고 오로지 관계 맺고 여기는 방식에 따라 잠시 그것으로 존재 한다는 개념이지요. 이를 불교 용어로 인연생이라 합니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이야기는 양자역학과 반야심경 사이의 친밀성을 잘 보여줍니다.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 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쌤앤파커 스, 55쪽)
바라밀다라는 구체적인 구도 행위, 즉 실천을 통해서 공의 진리를 터득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진리에서 실천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진리가 피어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의 삶은 지지부진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명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숙제가 아닙니다. 소명은 오로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자신 안 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의 온 전체가 원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 그것을 이루지 않고는 찝찝해서 견디기 어려운 것 입니다. 소명을 아는 자는 자신을 아는 자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지적 게으름에 빠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인연에 따라 다양한 계기들이 잠시 연합하거나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유라 합니다. 가유는 실유가 아닙니다. 인연법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성질을 근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은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연으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논리적인 개념일 뿐.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고 얻어진 능력을 지적 능력이라고 합니다.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으면 누군가를 쉽게 존경 할 수 없습니다.
정진해야 건너갈 수 있습니다. 정진하는 태도를 이르면 바로 멈춰서게 됩니다.
상을 짓지 않으면 성불한다.
무소유는 갖지 말라, 쌓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유는 세계를 자기의 뜻에 맞게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태도입니다. 무소유는 소유적인 태도를 없애라는 말이니, 세계를 자기 뜻대로 정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 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혹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이론이나 진리를 통해서 세계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통해서 진리와 이론을 건축하는 존재입니다.
삼법인이란 '진리의 도장'이라는 의미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셋을 말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변하고, 세계에 '나'라 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러니 온갖 번뇌와 분별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상선약수라는 구문 다음에 바로 수선리만물이부쟁이 나옵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물은 세상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일을 누군가와 특정한 구도 속에서 경쟁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노자는 그러므로 고기어도, 도에 가깝다'라고 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일반성, 누구나 하는 말, 정해진 생각에 자신을 가두지 않습니다.
도덕경 제2장에서 노자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니까,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추한 일"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 힘든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힘들어하는 자신이 있을 뿐이죠. 자신의 기준을 최대한 줄이고, 그냥 눈앞에 닥친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 되고, 그러다 보면 멀리 가게 된다 생각하고 삽니다. 이상과 꿈을 지키는 것과 기준을 지키는 일은 다른 일이니까요.
여러분도 《그리스인 조르바》 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떠오르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은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고 생각하며 사는 삶입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신채호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희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희가 되지 않고 주희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가까운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온 신념이나 이념이 자신을 휘어잡도록 허락하지 않고, 진실한 자신을 그 모습 그대로 지켜냅니다. 이 세계가 공임을 아는 사람은 신념이나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그것들을 지배하여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건너가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