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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Nov 14. 2015

영화음악 사상 가장 아름다운 삼바

더 붐, 1963

2차 세계대전 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탈리아 사회상을 필름에 담은 네오리얼리즘은 4-50년대 이탈리아 영화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아마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힐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은  비토리오 데 시카 Vittorio De Sica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네오리얼리즘은 50년대 중반쯤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이탈리아 정부는 자국민의 비참한 생활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 현상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5-60년대 사이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산업 전반에 붐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영화로 빈곤을 전시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정부는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에 제동을 건다. 좀 더 긍정적이고 밝아진 이탈리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칙칙한' 네오리얼리즘에 화사한 빛깔을 입힌 핑크 네오리얼리즘(Pink Neorealism)이라는 가벼운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코미디아 알 이탈리아(Commedia all'italiana), 즉 이탈리아식 코미디들이 네오리얼리즘의 바통을 이어받았고, 비토리오 데 시카도 기꺼이 그 대열에 동참했다. 1963년 그가 연출한 <더 붐 Il Boom>은 호황을 누리는 이탈리아 상류층을 겨냥해 풍요 속 빈곤을 들춘 블랙 코미디였다.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귀여운 아기와 멋진 빌라에서 사는 알베르토는 부러울 것 없는 건축업자다. 그러나 요령부득에 가까운 그의 사업 수완은 자꾸 빚을 지게 만들고, 그 와중에도 지인들과 화려한 생활을 계속 누리면서 결국 알베르토의 채무는 감당하지 못할 지경으로 늘어난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아내 실비아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빚을 대신 탕감할 여력이 없는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 곤란에 처한 그에게 백만장자의 아내인 부세티 부인이 은밀한 제안을 건넨다. 한쪽 눈을 잃은 그녀의 남편에게 건강한 안구를 기증하면 알베르토가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빚과 자신의 안구를 두고 갈등하는 알베르토에게 그동안 아내에게 숨겨왔던 채무관계가 탄로 나면서 상황은 절박해지고, 결국 그는 부세티 부인과 돌이킬 수 없는 거래를 맺는다. 

 

그동안 몇 차례 이름을 거론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앨범을 소개한 적 없는 피에로 피초니 Piero Piccioni는 엔니오 모리꼬네가 좋아하는 세 명의 이탈리아 영화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나머지 두 사람은 니노 로타 Nino Rota와 카를로 사비나 Carlo Savina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재즈를 즐겨듣긴 했지만, 음악 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작곡과 연주법을 터득한 피초니는 그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인 1938년, 라디오를 통해 피아니스트로 데뷔한다. 그러나 세계 대전과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그의 활동은 중단됐고, 결국 전쟁이 끝난 44년에야 방송에 복귀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렵 피에로 피초니는 법학도였다는 것. 허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첫 번째 영화음악 작곡을 의뢰 받으면서 과감히 법복(法服)을 벗고 지휘봉을 잡았다.


이탈리아 영화음악의 황금기를 이뤄낸 많은 작곡가들이 그렇듯 피에로 피초니의 스코어 역시 재즈의 색채가 강하다. 모리꼬네가 스파게티 웨스턴에 로큰롤의 감각을 끌어들였다면, 피초니는 서부 영화음악에 재즈의 기법을 도입했을 만큼 재즈의 음률을 사랑했다. 이탈리아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탄 빅 밴드 오케스트라 013의 리더로, 이탈리아 출신 뮤지션들 중 유일하게 찰리 파커와 호흡을 맞춘 연주자로, 그리고 하몬드 오르간으로 사이키델릭 재즈의 향기를 이탈리아 영화음악으로 선보인 피초니의 재즈 사랑은 이탈리안 재즈의 역사와도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한다.   


<더 붐>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l  Think Cinema(2010)


피에로 피초니가 작곡가로 참여하긴 했지만 빌리 본 Billy Vaughn의 'Wheels'가 <더 붐>의 메인 테마로 사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메리칸 재즈를 사랑했기에 한때 '피에로 모건 Piero Morgan'이라는 미국식 예명을 썼을 정도로 그의 재즈 스코어는 아메리칸 재즈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전세계를 강타한 빌리 본의 히트곡에게 메인 테마의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더 붐>에서 피초니의 스코어에 눈여겨볼만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무렵 피초니의 영화음악은 사이키델릭 재즈의 색채가 짙어지는 시기였다(<더 붐>과 함께 같은 해 나온 장 뤽 고다르 Jean-Luc Godar의 <경멸 Il Disprezzo>은 그 정수를 보여준다). 


돈을 융통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알베르토의 바쁜 하루를 그린 'Organ Grinders Boom'에는 하몬드 오르간 특유의 가벼운 음색이 흑백의 화면을 로맨틱한 향기로 물들인다. 주인공 알베르토의 대책없는 낙천성이랄까, 호황을 누리는 이탈리아 경제의 밝은 분위기랄까. 그런 시대의 활기와 공기가 번들거리는 전자 오르간 사운드 속에 펼쳐진다. 그러나 속빈 강정 같은 알베르토의 사정은 금방 들통나고 만다. 뿡빵거리는 브라스 선율로 사채업자와 한바탕 언쟁을 벌이고 나온 알베르토의 무거운 발걸음이 'Spleen Economico(경제의 불화)'에 실려있기 때문이다. 같은 멜로디를 색소폰과 빅 밴드 오케스트라로 한결 더 윤기나게 편곡한 'Nuovo Spleen Economico(경제의 새로운 불화)'는 처량한 신세를 숨기기 위해 가족 앞에서 억지 웃음을 짓는 사나이의 울픈 심정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생계를 위해 자전거를 훔쳐야 했던 시대에 비하면 배부른 고민이지만, 빚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상황도 절박하기는 매한가지다.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는 때때로 뜻하지 않은 쪽으로 굴러가기도 한다. 레스토랑에서 살짝 안면을 익힌 부세티 부인이 알베르토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피초니는 <더 붐>을 보면서 그런 인생의 아이러니를 떠올렸던 것일까. 'Samba Della Ruota(수레바퀴의 삼바)'라는 타이틀이 붙은 9분 짜리 스코어는 이 사운드트랙 앨범을 명반으로 만든 장본인 같은 트랙이다. '영화음악 역사상 최고로 아름다운 스캣 삼바'라는 평가를 받은 이 스코어가 피초니에게도 붙여진 마에스트로라는 칭호가 결코 헛된 명성이 아님을 증명한다. 


긴장을 자아내는 퍼커션으로 시작해 촘촘하게 짜인 삼바 리듬 위로 흐르는 노라 오를란디 Nora Orlandi의 매혹적인 보컬이 길고 긴 러닝 타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분명 신나는 삼바의 리듬이지만, 가만히 멜로디를 듣고 있자면 서서히 고조되는 묘한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글썽거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코미디의 결말이 결코 웃음 짓도록 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터다. 수술을 앞두고 아기의 얼굴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마음, 아내의 행복한 표정을 뒤로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남편의 발길 그리고 공포에 질려 병원을 뛰쳐나갔지만 결국 다시 수술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의 심정이 이 생기발랄한 리듬 속에 스친다. 그렇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뜻밖의 행운 같은 허망한 해피 엔딩 대신 맵고 알싸한 풍자로 이 코미디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이다.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 만큼은 아니겠지만, <더 붐>에 흐르는 이 삼바의 여운도 결코 만만한 무게는 아니다.




01  [03:09]  Organ grinders boom

02  [02:39]  Spleen economico 

03  [09:22]  Samba della ruota 

04  [05:27]  Nuovo spleen economico 

05  [03:27]  Big-Ben boom 

06  [02:15]  Big boom hully gully

07  [02:10]  Tony twist

08  [02:15]  Calypso transistor

09  [03:25]  Nuovo 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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