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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Dec 01. 2015

코메다의 영화음악이 찍은 정점

악마의 씨, 1968

서른 줄에 접어든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는 생활의 공간인 아파트와 도시를 소재로 느슨한 연작 같은 무서운 영화 세 편을 만든다. 1965년 영국에서 제작한 <혐오 Repulsion>의 강박을 시작으로, 낯선 프랑스에서 새 삶을 꾸리는 이방인의 고독, 불안, 광기를 차례로 그린 <테넌트 The Tenant>로 꼬리를 문 이 스릴러는 폴란스키 특유의 모던한 비주얼과 병적인 음울함이 아로새겨진 수작이었다. 그 후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악마의 씨 Rosemary's Baby>는 피와 살이 튀는 잔혹한 호러가 아니었지만, 정적인 분위기로 압박하는 공포감 역시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했다. 특히 오컬트 영화의 효시로서 일상의 이면에 도사린 두려움을 들추는 젊은 폴란스키의 연출은 이후 제작된 심령 영화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현실을 뒤트는 <엑소시스트>의 기괴한 미장센이나 아이를 통해 악마의 계보가 이어진다는 <오멘>의 플롯뿐 아니라 슬픔과 공포를 동시에 간직한 영화음악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악마의 씨>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한 크쥐시토프 코메다 Krzystof Komeda(영어식으로 크리스토퍼 코메다 Christopher Komeda)는 영화음악보다 오히려 재즈계에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본업은 이비인후과 의사지만 재즈에 대한 그의 재능은 지금도 고향인  폴란드뿐만 아니라 유러피언 재즈의 전설로 남아있다. 사실 코메다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즈를 나이트클럽에 흐르는 타락한 서방 음악쯤으로 취급한 50년대 사회주의 폴란드에서 의사가 재즈를 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그는 자신의 본명인 트르친스키 대신 코메다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것. 감시의 눈을 피해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피아니스트와 재즈 밴드의 리더, 작곡가로 암약했지만 프랑스와 독일, 스칸디나비아까지 두루 이름을 떨친 그의 재즈는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헤닝 칼슨 같은 북유럽 감독의 귀를 사로잡으면서 유럽 영화음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크쥐시토프 코메다를 가장 아꼈고, 그를 영화음악이라는 또 다른 음악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은 로만 폴란스키다. 폴란드 정부의 감시를 피해 지하실에서 재즈 콘서트를 열 때마다 종종 콘서트장을 찾았던 영화 학도 폴란스키는 코메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누구보다 그의 음악을 자신의 영화에 쓰고 싶어 했던 감독이었다. 코메다가 영화음악가로 처음 이름을 올린 단편 <두 남자와 옷장 Dwaj Ludzie z Szafa>으로 시작해 10년 동안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그들이 열 번째 호흡을 맞춘 <악마의 씨>로 정점과 마침표를 동시에 찍는다. 이 심상치 않은 공포 영화가 개봉된 후 쏟아지는 찬사 속에 코메다는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그의 나이 불과 37세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코메다 식스텟(Sixtet)으로 폴란드에 모던 재즈의 향기를 처음 퍼뜨린 코메다는 말수가 별로 없는 조용한 성품이었지만, 반면 음악적인 카리스마는 상당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의해 탄생한 재즈가 5-60년대 프리 재즈와 아방가르드 재즈를 통해 전형성을 탈피하면서 나라마다 고유한 스타일이 더해졌고, 이 시기 활동했던 각국의 재즈 뮤지션들이 영화음악의 품에 안긴다. 미국에 퀸시 존스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피에로 피초니가, 프랑스에는 프랑수아 드 루베가, 폴란드에는 크쥐시토프 코메다가 바로 그런 뮤지션이었다. 사회주의라는 철의 장막 뒤에서 표현의 자유를 꿈꿨던 젊은 뮤지션은 프리와 아방가르드 재즈에 매료됐고, 거기에 동유럽 특유의 감성과 슬라브 민족의 서정성을 가미해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완성해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무렵 다양한 스릴러에 신시사이저와 프로그래시브 록(고블린이 그 대표 주자다)으로 하나의 원형을 제시한 이탈리아 호러 영화보다 코메다는 프랑스 누아르나 누벨 바그에 흘렀던 재즈 스코어에 더 가까운 음감을 서늘한 공포를 자아내는 음악으로 활용했다는 것. 생동감 넘치는 밥 스타일의 리듬과 음울한 음조를 교차시켜 피할 수 없는 밀실 공포증의 갑갑한 이미지를 재즈와 결합한 <물 속의 칼 Knife In The Water>은 폴란스키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폴란스키는 영화음악가로서 크쥐시토프 코메다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산증인인 셈이다.


<악마의 씨>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La-La Land Records(2012)


잿빛 뉴욕을 내려다보는 전지적인 시선과 분홍색 타이틀의 대비가 스산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의 오프닝을 위해 코메다가 마련한 멜로디는 뜻밖에도 자장가인 'Lullaby of Rosemary's Baby'. 갓 편집된 <악마의 씨>를 보자마자 10여 년 전 재즈 페스티벌에서 선보였던 자장가 선율을 떠올린 코메다는 일곱 가지 멜로디를 만들었고, 폴란스키는 그중 하나를 골라 이 영화의 테마로 삼았다. 그리고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로즈메리 역을 맡은 배우 미아 패로우 Mia Farrow에게 직접 허밍을 맡긴다. 무엇보다 단순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코메다의 스타일대로 심플하면서도 감미로운 멜로디에, 미아 패로우의 가공되지 않은 보컬이 더해지자 문자 그대로 소리와 공기가 반반씩 섞인 매력적인 선율이 펼쳐졌다. 애수와 공허 사이를 어정거리는 그녀의 음성은 관객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코메다는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처연한 선율에 잠시 봉인시킨다. 공포의 실마리를 보여주되, 그 정체를 미리 밝히지 않는 영리한 테마다. 그 때문이었을까. 강렬한 충격보다 은근한 잔상을 남긴 이 테마곡은 공감할만한 노랫말도, 유명 가수의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그 해 8월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심리 묘사에 가장 적합한 음악이 재즈라고 공언했던 크쥐시토프 코메다는 로만 폴란스키가 만들어낸 스타일리시한 이미지 속에 함몰되거나 길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쿨 재즈의 모던함과 이국의 서정성에 바탕을 둔 그의 스코어는 당시 할리우드의 고전 영화음악에서는 미처 맛보기 어려운 신선한 감각으로 가득했다. 이를 테면, 'The Coven'으로 시작하는 일련의 불길한 테마는 아방가르드와 실험적인 영화음악을 주저하지 않은 코메다의 대담함을 엿보인다. 영화에서 악마를 추종하는 아파트 거주자들의 집회 장면을 위해 실제로 사타니즘을 숭배하는 교회의 리더이자 『악마의 성경』을 집필했던 안톤 라베이를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음산하게 속삭이는 미지의 보컬은 밀교의식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제리 골드스미스 Jerry Goldsmith가 작곡한 오컬트 영화음악의 걸작 <오멘>에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다. 할리우드 공포 영화음악의 뿌리가 된 아방가르드 스코어가 이 폴란드 작곡가로부터 비롯되었고, 역으로 다시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한국 공포 영화음악에도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조성우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이병우의 <장화, 홍련> 그리고 김태성의 <검은 사제들>까지. 


자칫 단조롭게 들리지만, <악마의 씨>에 깔린 음악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이질적인 선율이 기묘하게 어긋나고 또 미묘하게 맞물리면서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재즈라는 음악의 틀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즈를 활용한 코메다의 스코어는 양파 껍질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새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로맨틱 무드로 접근하는 느긋한 선율이 로즈메리가 느끼는 공포를 그녀의 판타지일 뿐이라고 일축하게 만들지만, 다양한 멜로디의 외피를 두른 자장가로 엄습해오는 긴장감이 왈츠의 리듬을 타고 마침내 정체를 밝힐 때 관객은 아연실색하고 만다. 음악에 허를 찔린 것이다. 로즈메리가(그리고 관객이) 믿었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릴 때 다시 재즈는 그녀가 느끼는 날 것 그대로의 공포와 절망을 애달픈 선율로 드러낸다. 늘 선이 악을 물리치는 엔딩만 보아온 당시 관객들이 느꼈던 충격은 요즘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코메다는 호들갑스러운 할리우드 스타일이나 악취미 같은 이탈리아 호러의 경쾌한 록으로 대미를 장식하지 않았다. 1966년 6월(의미심장한 숫자다)에 태어난 아기를 잠 재우기 위해 로즈메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자장가를 부른 이래 공포 영화에서 음악은 충격의 여파가 아니라 여운을 남길 때 더욱 길고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하다. <악마의 씨>는 코메다가 공포 영화음악에 찍은 정점이자 방점, 마침표이자 이정표다.  




Original Soundtrack Album

01 [02:22] Lulla From Rosemary's Baby, Part 1_ Mia Farrow

02 [00:45] The Coven

03 [02:08] Moment Musical

04 [03:48] Dream

05 [01:59] Christmas

06 [02:22] Expectancy

07 [02:25] Main Title(Vocal)_ Mia Farrow

08 [02:03] Panic

09 [02:07] Rosemary's Party

10 [01:44] Through the Closet

11 [01:28] What Have You Done to Its Eyes

12 [02:00] Happy News


Film Score

13 [02:30] Main Title

14 [01:00] Furnishing the Apartment

15 [00:36] Chanting

16 [04:11] Dream

17 [01:03] Lullaby

18 [01:16] The Pain/How to Prepare a Good Steak/The Ear

19 [01:30] Holiday Music

20 [01:04] After the Call to Hutch/Good Apetite

21 [01:16] Lullaby - Crib Sequence 

22 [02:03] Scrabble

23 [02:51] Book About Witchcraft/The Horrible Doctor/The Fragrance

24 [01:13] The Horrible Doctor #2/The Short Dream

25 [02:58] The Iron Bars/Elevator-Lift/Dr. Sapirstein and Syringe

26 [01:55] Path to Pit of Evil #1

27 [01:41] Path to Pit of Evil #2-3

28 [01:27] What Have You Done?

29 [01:11] End Title


Source Music

30 [02:14] Moment Musical

31 [00:14] Bossa Nova

32 [01:32] TV Music

33 [02:03] Moment in Time

34 [03:58] Moment Musica Jazz


Bonus Tracks

35 [02:23] Lullaby From Rosemary's Baby(Main Title from soundtrack)

36 [02:13] Lullaby From Rosemary's Baby, Part 2(Dot Records Single, B-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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