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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May 08. 2016

청춘이라는 고통
청춘이라는 위안

키즈 리턴, 1996

두 소년이 마주 보고 자전거를 탄다. 핸들에 걸터앉은 소년을 향해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장난스레 투덜거리면서도 맞은 편 또 다른 소년은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돌아가는 페달을 멈추자마자 자전거는 바로 쓰러질 테니까. 앞이 보이지도, 뒤로도 달릴 수 없는 자전거를 탄 그들은 텅 빈 운동장을 하릴없이 맴돌 뿐이다. 그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들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것처럼. 청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오직 전진하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것. 오로지 쓰러지지 않기 위해. 기타노 다케시(北野武)표 영화를 위한 음악답지 않게 질풍노도의 속도감으로 다가오는 히사이시 조(久石譲)의 오프닝 타이틀 'Meet Again'엔 전에 없던 청량한 멜로디 아래 다양한 리듬이 귀에 부쩍 밟힌다. 이 영화 <키즈 리턴(キッズリターン)>은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비트 다케시의 무표정하고 냉혹한 영화와는 어딘가 좀 다를 거라고 미리 귀띔하듯이.  


히사이시 조의 <키즈 리턴>의 영화음악을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앨범에는 일본인 스스로 철저하게 표기하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라는 명칭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영화를 위해 애초에 녹음한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라 앨범 제작을 위해 히사이시 조가 다시 편곡하고 재녹음한 버전의 테마곡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앨범으로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중요한 미덕인 오리지널리티가 일부 거세된 셈이다. (영화에서보다) 좀 더 완전한 편곡을 보여주고픈 욕심과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자리잡지 않았던 90년대 아시아 영화음악은 간혹 이런 기이한 사운드트랙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추가하자면 우리가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기타노 다케시와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관계는 의외로 나빴다는 것. 다케시 감독의 말을 빌면, 싸움의 연속이었던 두 사람의 작업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고. 감독으로부터 겨우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 영화에 사용했던 메인 테마곡이 성에 차지 않았던 히사이시 조는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건 앨범엔 일부러 좋아하는 버전을 수록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든다.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이미지 앨범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위치를 스스로 감수하면서까지. 


<키즈 리턴>의 사운드트랙 ㅣ Polydor(2001)


감독과 작곡가의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음악엔 불협화음의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 <키즈 리턴>은 그 대신 대조와 대비, 대립과 같은 어떤 콘트라스트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사루와 신지를 중심으로 학교 친구와 야쿠자 그리고 체육관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표리 부동한 인간관계처럼.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가 때때로(그리고 결과적으로) 역전되는 순간마다 차가운 신시사이저의 음색은 오히려 따스한 선율을 품고, 멜로디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퍼커션은 리듬으로 거기에 열기를 더한다. 기묘한 조화다.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샤워 꼭지로부터 각각 쏟아져나오는 냉수와 온수를 한꺼번에 맞는 느낌이랄까. 


음색과 선율의 대비, 멜로디와 리듬의 대조, 전자악기와 어쿠스틱 악기의 대립처럼 이 영화의 음악엔 어느 하나 조화로운 구석이 별로 없다. 표면적으로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은 없지만, 콘트라스트에서 오는 모종의 긴장감이 음악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뉴에이지라는 안락하고 중성적인 사운드에 담겨서. 그 대표적인 스코어가 'As A Rival'. 마사루를 따라 덩달아 권투를 시작하게 된 신지가 그와 함께 조깅할 때 흐르던 이 곡엔 차분한 긴장감이 돋보인다. 서로를 앞지르기 위해 달리는 두 사람의 보폭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신시사이저 멜로디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경쟁심을 들춰낸다. 멜로디 자체가 리듬이면서, 그 리듬의 음계를 수시로 바꾸는 신시사이저의 음색은 의외로 경쾌하고 발랄하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은 두 소년처럼.


자신의 꼬붕이라고 여겼던 신지에게 패한 마사루가 체육관을 떠난 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신지는 복서로서, 마사루는 야쿠자로서. 그러나 화려하고 멋지게만 보였던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내딘 그들은 엄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건 비단 신지와 마사루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사랑을 얻었지만 생계를 위해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든 청년은 상사의 폭언에 시달리고, 전도유망했던 젊은 복서는 챔피언 타이틀을 목전에 두고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용돈으로 회유한 요리사에게 부하 대신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내는 차가운 야쿠자 보스와 체중감량을 돕는 선배 복서의 충고는 젊은 루키에게 독으로 돌아온다. 성당의 오르간 소리를 모사한 전자 사운드로 링 위에 쓰러진 신지의 표정을 비장한 터치로 그린 'Defeat'와 암살된 보스의 복수를 다짐하다 야쿠자 세계의 룰을 벗어난 마사루에게 되레 처절한 린치가 가해질 때 흐르는 'Break Down'은 아프리칸 비트로 그들의 절망과 고통을 격화시킨다. 역시 냉기와 온기가 교차하는 스코어로. 


히사이시 조는 건반악기를 연주하는 자신을 포함해 각각 한 명의 기타와 퍼커션 연주자를 데리고 모든 스코어를 녹음했다. 상당히 단출한 구성이지만, 꽉 찬 사운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딘가 비어있는 것처럼 들리는 뉴에이지 풍의 선율은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그 허전해진 마음을 다독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 음악처럼 <키즈 리턴>의 소년들이 겪는 고통과 위안은 한 몸이 아닐까. 청춘이라는 고통과 청춘이라는 위안. 그리고 끝이라는 말에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너스레를 떨 수 있는 청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전한 테마로 들리는 'Kids Return'이 흐를 때, 페달을 밟는 그들의 발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01 [05:00] Meet Again

02 [01:05] Graduation

03 [02:19] Angel Doll

04 [01:12] Alone

05 [01:27] As A Rival

06 [05:06] Promise... For Us

07 [01:26] Next Round

08 [03:29] Destiny

09 [02:17] I Don't Care

10 [02:01] High Spirits

11 [02:27] Defeat

12 [03:44] Break Down

13 [02:49] No Way Out

14 [00:40] The Day After

15 [04:40] Kids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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