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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Jun 27. 2016

음악의 질감으로 그린 인물화

모딜리아니, 2004

아티스트는 언제나 영화의 매혹적인 소재였다. 예술을 삶의 목표이자 가치로 삼았기에 정작 돈벌이엔 어두웠던 그들의 일생은 대개 고달팠고,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드라마틱했다. 그뿐이랴. 재능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가족, 사회, 관습과 충돌했던 고독한 예술 세계는 때때로 광기에 휩싸였고,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마감한 생은 숱한 추측과 또 다른 이야기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다 갔어도 그들의 삶엔 어떤 패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꿔 말하면, 예술가를 소재로 한 영화는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라는 굴레로부터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여러모로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과 비교되는 믹 데이비스Mick Davis의 <모딜리아니Modigliani>도 상투적인 장면이 더러 눈에 밟힌다. 살아생전 그림 한 장 제대로 팔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요절한 모딜리아니의 생애는 그 자체로 배고픈 예술가의 전형이지만, 극적 효과를 더하기 위해 끌어들인 피카소와의 대결 구도, 자잘한 해프닝에 그치는 기행(奇行)들 그리고 술과 아편이 부추기는 자기 분열과 파괴의 이미지는 영화 속 모딜리아니의 모습에 이끌리다가도, 덜컥 몰입을 방해하는 양날의 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이 영화 <모딜리아니>의 치명적인 흠결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화가의 불행한 생애를 몰랐다면 한결 흥미로울 이 팩션 영화는 그의 그림을 애련한 심정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살짝 기울어진 머리, 유난히 길어 보이는 목덜미 그리고 심연 같은 눈동자를. 


어린 시절 아버지가 건넨 화첩에서 화가와 조우한 믹 데이비스 역시 그 이미지에 빠져들었다. 심한 천식 때문에 춥고 긴 겨울을 집안에서 보내야 했던 열두 살 소년에게 결핵 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모딜리아니는 연민을, 그와 반대로 늘 자신만만했던 피카소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반세기 동안 그를 가슴에 품은 데이비스가 영화감독으로 데뷔 후 가장 먼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스크린으로 불러낸 것도, 두 화장(畫匠)이 영화에서 서로 날을 세우게 된 것도 그러고 보면 감독의 오래된 기억이 작용한 셈이다. "당시 살았던 누구도 생존해있지 않았으므로 상황을 상상해 카메라 프레임에 담고 싶었습니다. 의상, 제스처, 대화 그리고 음악도요." 고증보다 상상에 무게를 둔 덕분에 흥미진진한 시나리오가 만들어졌지만, 고통과 희열 사이를 서성이는 모딜리아니를 좀 더 생생하게 그려내고팠던 감독은 막바지 단계에서 음악에 의지하기로 한다.


문제는 이제 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믹 데이비스는 좋은 영화음악을 원했으나, 어떤 음악이 자신의 영화에 좋은 지는 몰랐다는 것. 훌륭한 영화에는 늘 뛰어난 영화음악이 있다는 사실만이 그가 아는 확실한 것이었다. 호기롭게도 이 젊은 감독은 애초 브라이언 페리Brian Ferry에게 삽입곡을, 엘머 번스타인Elmer Bernstein에게 스코어를 맡기려 했다. 그러나 베테랑 영화음악가를 고용하기엔 예산도, 경험도 부족한 신예 감독에게 적당한 작곡가를 물색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 가이 팔리Guy Farley는 프로듀서가 그런 감독에게 적임자라며 추천한 이름이었다. 같은 영국 출신이자 비슷한 연배인 팔리 역시 영화음악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고, 테레사 수녀의 삶을 그린 <마더 테레사Madre Teresa>의 스코어로 근래 주목을 받던 터였다. 허나 풋내기 작곡가가 마뜩잖은 믹 데이비스는 프로듀서의 제안을 거절하며 버텼고, 결국 작곡가인 팔리가 직접 나서 그를 설득한다. 가편집해 놓은 필름을 보고 급히 작곡한 데모곡을 감독에게 보냈던 것. 심드렁한 표정으로 데모곡을 듣던 감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화에 포개 놓은 미지의 선율에 점점 빠져들고 만다. 어린 시절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처럼.


<모딜리아니>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Milan Records(2004)

 

전기 영화긴 하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일대기가 아니라 화가가 숨을 거두기 1년 전인 1919년을 영화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그와 그의 마지막 연인, 잔느 에뷔테른의 비극적인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작곡을 위해 편집본을 본 가이 팔리 역시 그들의 사랑과 절망이 아로새겨진 마지막 장면에 유난히 마음이 동했고, 메인 테마가 된 데모곡 역시 거기에서 출발했다. 에릭 사티 혹은 드뷔시를 연상케 하는 피아노 멜로디에 처연한 바이올린 선율이 그늘처럼 드리워진 오프닝 타이틀 'You Can't Change Destiny'부터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의 설레는 첫 만남을 회상하는 'The Hat First' 그리고 사랑을 잃은 여인의 쓸쓸한 독백이 가슴을 저미는 'Jeanne's Death'까지 영화 내내 이어지는 피아노의 애달픈 음색은 두 사람의 로맨스가 자리하는 곳마다 어김없이 흐른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라면, <모딜리아니>에게 그토록 마음을 뺏기진 않았으리라. 이 영화의 음악이 훙미로운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질감. 음악의 질감이다. 


갑신정변에서 동학농민운동까지의 시간을 열 폭 짜리 병풍처럼 펼쳐놓은 <취화선>이 장승업의 영모화(翎毛畵)를 닮았다면, <모딜리아니>는 크지 않은 캔버스에 담긴 인물화에 가깝다. 사진처럼 정교한 그림이 아니라 어떤 화파, 어떤 화풍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실화라는 희미한 밑그림 위에 두텁게 물감을 발라놓은 마티에르(matiere)처럼 이 영화를 덧칠하는 음악의 질감은 부드러우면서도 거칠다. 관록 있는 작곡가라면 절제하거나 주저했을 법한 순간에도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선율은 오히려 가이 팔리가 젊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모딜리아니 역시 왜곡에 가까운 표현 기법으로 시대를 앞서간 젊은 화가가 아니던가. 패기에 넘치는 영화 감독과 작곡가 그리고 예술가. 그러고 보니 참 찰떡궁합이다. 디테일보다 스타일을 우위에 뒀기에 굴절된 실화의 세계는 음악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이 파리의 뒷골목을 거닐 때 그들의 실루엣을 휘감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La Vien Rose'는 30년쯤 지난 뒤에야 발표될 노래지만, 가난한 연인의 아름다운 시절과 파리의 낭만을 담아낼 더 좋은 곡을 찾기 어려웠던 감독과 작곡가는 축음기의 예스러운 질감을 살려 그 곡을 밀어붙인다.


크로스오버 가수인 사샤 라자드Sasha Lazard의 이름을 기억케 했던 'Ode To Innocence'는 또 어떤가. 이 영화를 통해 세계적으로 사랑받게 된 이 곡은 16세기 이탈리아 음악가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의 'Ave Maria'를 재해석한 곡. 모딜리아니를 탐탁지 않게 여긴 장인이 손녀딸을 수녀원에 보내자 아이를 되찾아올 돈을 마련하기 위해 화가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살롱전에 참가한다. 모딜리아니와 피카소, 샤임 수틴, 모이즈 키슬링, 리베라 디에고. 당대를 주름잡는 몽파르나스의 화가들이 저마다 경연에 출품할 그림을 준비하는 찬란한 순간이 여기에 담겨있다. MTV 뮤직비디오를 떠올리게 하는 감각적인 화면 아래 깔린 파격적인 사운드. 테크노 뮤직으로 그린 벨 에포크다. "그 화가들은 당시 지구 상에서 가장 모던한 예술가들이었죠. 저는 그들을 오늘날 가장 힙한 아티스트들처럼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감독인 믹 데이비스의 말이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믿을 스피디한 편집에 작곡가는 잠시 당황했지만, 그의 의도를 받아들인 팔리는 랩과 샘플링을 추가해 한층 트렌디하게 이 곡을 리믹스해 놓는다. 음악이 영화에서 제대로 작동하느냐의 문제이지, 영화음악에 정해놓은 규칙은 없다면서.


삽입곡뿐 아니라 팔리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 역시 규칙에서 자유롭다. 그중 백미라면 화가의 고뇌를 포착한 이국적인 사운드가 아닐까.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음악이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몸과 마음의 통증을 덜기 위해 아편굴을 찾는 화가. 그의 몽롱한 표정 위로 내려앉는 아프리카의 환상은 강렬한 비트와 알제리 가수 압델 알리 슬리마니Abdel Ali Slimani의 구성진 보컬로 현현한다. 팔리지 않는 그림에 불안을 느껴 잠시 조각가로 활동했던 모딜리아니를 매료시킨 아프리카의 원시 조각상들. 몇 년 뒤 다시 화가로 복귀한 그는 기다란 목과 눈동자가 없는 갸름한 조각상의 얼굴을 화폭으로 옮겼다. 'Opium Den'과 'Opium Nightmare'에 담긴 아프리칸 사운드는, 우리가 아는 모딜리아니의 스타일이 그로부터 비롯됐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영화에서 생략해버린 그의 과거를, 젊지만 영민한 이 작곡가는 음악으로나마 희미하게 되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에스닉 사운드는 성난 황소처럼 충돌하는 모딜리아니와 피카소의 대결 구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피카소를 자극해 살롱전에 참가하게 만드는 'Call the Police'는 플라멩코의 빨마스(손뼉치기)로 그가 스페인 태생임을 짐작케 하는 'One Condition'과 더불어 이국의 사운드로 빚어낸 질감의 극치를 보여준다.


마침내 경연 당일, 하나씩 공개되는 화가의 작품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화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그만 절명한다. 가냘픈 플루트와 피아노 선율로 화가의 명복을 비는 'Sleep Modi Sleep'에 이어, 그를 추억하는 에뷔테른의 쓸쓸한 독백이 'My Empty Life'에 스친다. 광채를 잃은 로맨틱한 멜로디가 그녀가 걸친 푸른 드레스처럼 애처롭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화가의 마지막 그림을 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멀리서 보면 푸른색 옷을 입은 여인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암울한 검은색도, 정열의 붉은색도, 환희의 노란색도 숨어있는 것처럼 에뷔테른을 위한 최후의 선율에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움, 울분, 안타까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다양한 빛깔이 어우러져 모딜리아니의 중후한 색감을 자아내듯, 이 영화음악의 깊고 두터운 질감에서도 예술가의 뜨거운 손길이 느껴진다.




01 [03:25] Modigliani Suite 

02 [01:25] You Can't Change Destiny  

03 [02:40] The Hat First 

04 [02:02] Ancient Law 

05 [01:52] Confession

06 [03:04] La vie en rose_ Edith Piaf  

07 [01:44] One Condition 

08 [01:35] Unfit Mother 

09 [02:33] Opium Den  

10 [02:14] You'll Die with Him 

11 [02:10] To Renoir

12 [03:34] Opium Nightmare

13 [01:50] Never Again 

14 [04:10] Call the Police 

15 [04:43] Ode to Innocence_ Sasha Lazard  

16 [02:25] The Competition 

17 [03:40] Reach Beyond Belief 

18 [03:08] Sleep Modi Sleep 

19 [03:05] My Empty Life 

20 [01:25] Wait for Me 

21 [01:32] Jeanne's Death

22 [05:52] Angeli_ Sasha Laz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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