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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Jul 05. 2016

홍콩 누아르의 탄생

영웅본색, 1986

장철(張徹)과 호금전(胡金銓)이 이룬 무협영화의 전통에, 할리우드식 특수 효과를 접목해 새로운 스타일의 무협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던 서극(徐克)은 83년 야심 차게 개봉한 <촉산(新蜀山劍俠)>의 흥행 실패로 뼈저린 교훈을 얻는다. 당시 홍콩 영화의 제작 시스템으로서는 미국과의 기술적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는 것.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와 비슷한 수준으로 맞출 수 있을만한 항목을 추려 영화 제작의 보완점으로 삼는 그의 전영공작실(電影工作室)이 차려졌고, 조명을 비롯해 편집과 음향 그리고 음악 같은 세세한 분야를 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할 주요 타깃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불세출의 음악가 황점(黃霑)과 호흡을 맞춘 <상하이 블루스(上海之夜)>에서 그런 변화의 조짐을 내비친 서극은 곧바로 오우삼(吳宇森) 감독과 의기투합해 주로 코믹한 액션 영화에서 양념으로나 활용되던 범죄 조직의 세계를 드라마의 중심으로 옮긴 하드보일드 영화를 기획한다. 바로 <영웅본색(英雄本色)>이었다. 그동안 대안으로 내세웠던 프로덕션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서극은 작곡가 고가휘(顧嘉煇)를 영입해 사나이의 가슴에 불을 댕긴 멜로디에 유난히 공을 들였고, 그 곡은 오래도록 진한 향기를 뿜었다. 홍콩을 너머 아시아 그리고 저 멀리 할리우드에 이르기까지. 영화 개봉 후 15년이 지난 뒤 홍콩이 아니라 일본의 한 열혈팬에 의해 사운드트랙 앨범이 뒤늦게 빛을 보게 된 것 역시 그 향기를 잊지 못해서였으리라.


<영웅본색>의 인상적인 장면엔 늘 인상적인 음악이 깔린다. 감각적인 편집으로 위폐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오프닝, 풍림각에서 벌어지는 우아하고도 살벌한 총격씬, 홍콩의 야경 속에 빛나는 신시사이저 음색. 그리고 이제는 추억이 된 장국영의 주제가 '당년정(當年情)'까지. 이전의 어느 홍콩 영화보다 어두웠지만, 그 이전의 어느 홍콩 영화보다 밝게 명멸하는 음악은 뒷골목의 농밀한 어둠을 뚫고 반짝인다. 조명과 편집의 힘이 누아르에 더없이 어울리는 도시로 홍콩을 변모시켰다면,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현실감 없는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음악에 힘을 얻었다. 


황점을 만나 점점 더 영화음악의 위력에 대해 실감했던 서극은 <영웅본색>을 제작하면서 그의 파트너인 고가휘를 함께 불러들였다. 황점 작사, 고가휘 작곡의 드라마 주제가는 70년대 중반부터 황점이 숨을 거둔 2000년대 초까지 흥행을 노리는 텔레비전 드라마라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암묵적인 공식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주제가가 언제나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황점과 고가휘 콤비가 선보인 주제가는 늘 사랑받았고, 비장함과 애틋함이 동시에 감도는 '당년정'은 홍콩 누아르의 신호탄이자 대표작이 된 이 영화에 그야말로 화룡점정이 됐다. 그러나 <영웅본색>에서 영화음악이 감흥을 일으키는 순간은 오로지 장국영의 주제가가 흐를 때만은 아닐 것이다. 


<영웅본색>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TRIARROW(2002)


영화에 삽입하는 어떤 음악보다 주제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의 전통은 스코어에 기대도, 비중도 별로 두지 않았다. 적어도 <영웅본색> 이전까지는. 문자 그대로 영화의 배경음악일 뿐 가사 없이 연주되는 음악에 영화의 메시지를 담는다거나 거기에 감정을 이입시킨다는 것이 좀처럼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에 음악을 넣지 않으면 밋밋하기에, 그저 빈 여백을 메꾸기 위해 기계적으로 음악을 깔았을 뿐이다. 이런 경향은 주제가가 수록된 음반은 찾을 수 있어도, 오리지널 스코어가 온전히 담긴 사운드트랙 앨범을 홍콩 영화에서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극은 달랐다. 메인 테마로 대표되는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그는 주제가와 차별화된 연주곡의 필요성을 느꼈고, 고가휘를 작곡가로 초대하면서 오프닝에 사용할 메인 테마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을 주문했던 것이다. 


62년 버클리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고가휘는 재학 당시 재즈와 뮤지컬 그리고 영화음악을 연구했던 인물. 서극이 느낀 할리우드 영화음악 스타일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작곡가였다. 비록 충분한 예산과 시간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신시사이저로 한계를 깬 이 영화의 오프닝 테마는 박력이 넘쳤고 동시에 스타일리시했다. 트렌치코트가 어울리지 않는 후덥지근한 홍콩의 날씨마저 잊게 했을 만큼. 80년대 영화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해럴드 팰터마이어Harold Faltermeyer의 신스팝을 연상시키는 매끄러운 멜로디와 강렬한 일렉 기타음, 거기에 바로크 스타일까지 가미시킨 그의 오프닝 테마는 영화에 서린 비감과 어둠의 정서를 한껏 돋운다. 


<영웅본색>의 영화음악이 주는 흥미로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보다 스타일리스트로, 그리고 감독보다 제작자로서 면모가 더욱 두드러졌던 서극은 영화의 신기술과 유행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그런 그가 동시대 할리우드의 경향을 놓칠 리 없었다. 오리지널 스코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삽입곡을 활용하는 80년대 영화음악 스타일의 가장 크고 새로운 변화를. 가장 핫한 최신곡을 중심으로 영화에 선곡된 노래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곡은 바로 '기허풍우(幾許風雨)'. 85년에 구창모가 발표한 '희나리'를 번안한 곡으로 황점, 고가휘 콤비의 <사망유희(死亡遊戱)> 주제가를 불렀던 나문(羅文)의 보컬은 애잔함에 비장함을 더한다. 풍림각에 들어선 마크가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반기던 진소운(陳小雲)의 '면실지(免失志)' 역시 영화가 개봉된 86년에 발표된 곡으로, 진소운의 데뷔곡 '춤추는 소녀(舞女)'는 퇴폐적인 분위기로 국민당 정부가 한동안 금지곡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그녀의 토속적인 민남어 노래는 대만과 룸살롱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를 고려한 선곡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린이들의 합창으로 삽입된 '명천회갱호(明天會更好)'는 대만의 가수 겸 작곡가인 나대우(羅大佑)의 곡. 85년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해 제작된 'We Are the World'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곡은 대만 독립 4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발표됐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곡이 '더 나은 내일(A Better Tomorrow)'을 의미하는 <영웅본색>의 영문 제목이자, 서극과 오우삼이 이 영화를 기획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이다. 홍콩의 본토 반환을 10년 앞둔 시점. 동양의 세계관과 서양의 가치관이 혼재했던 홍콩은 한몫 잡아 다른 나라로 뜨려는 이들과 또 다른 내일을 꿈꾸며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공존했다. 의리와 돈을 저울질하는 <영웅본색>의 비극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막연히 불안한 미래를 기다리는 홍콩인들에게 서극과 오우삼은 새로운 영웅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지만 참된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다소 허황되고 과장된 경로를 거쳐 도달하긴 했지만, 땅에 떨어진 의리는 결국 지켜지고, 형을 미워했던 동생은 다시 손을 잡는다. 그리고 음악과 함께 홍콩 누아르가 비로소 탄생했다.




01 [03:26] メインタイトルーオープニング / 메인타이틀 오프닝

02 [02:18] 宋家の人々 / 송가의 사람들

03 [02:28] 楓林閣 / 풍림각

04 [01:09] 時は流れ... / 시간은 흘러

05 [01:06] ホーのテーマ / 송자호의 테마

06 [02:38] 新たなる出發 - 再会 / 새로운 출발 - 재회

07 [04:04] 陰謀 - 行動開始 / 음모 - 행동개시

08 [01:00] 香港の夜 / 홍콩의 밤

09 [02:58] 嘆きの男 - 波止場の二人 / 탄식하는 남자 - 부두의 두 사람

10 [01:36] マークのテーマ / 마크의 테마

11 [02:06] 怒りの銃弾 / 분노의 총탄

12 [00:54] マークの死 / 마크의 죽음

13 [04:33] 兄弟の絆 - 當年情(インスト) / 형제의 연 - 당년정(연주곡)  

14 [03:21] 免失志(면실지)_ 陳小雲

15 [04:38] 幾許風雨(기허풍우)_ 羅文

16 [04:32] 明天會更好(명천회갱호)_ 松江兒童合唱團

17 [03:35] 英雄本色(영웅본색)

18 [04:10] 當年情(당년정: 가라오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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