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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 Jun 22. 2019

향수와 자유의 멜로디

빠삐용, 1973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스물네 살 청년이 1931년 프랑스 법정에 섰다. 혐의를 부인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법원은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악명 높은 교도소에 가두었고, 수없이 무죄를 주장하던 청년은 수차례 탈옥을 시도했다. 1945년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베네수엘라에 식당을 열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손님에게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껄렁껄렁한 건달 같은 사내가 어느 날 갑자기 펜을 잡고 공책에 지난 일을 적어 내려 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 후. 감옥에서 도망친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 성공했다는 어느 여죄수의 소식을 접하고 나서였다. 공책 열 세 권을 빼곡히 채운 그의 글은 1969년 프랑스에서 출판되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예순세 살에 작가로 데뷔한 사내의 이름은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ère, 하지만 사람들은 그보다 '빠삐용'으로 불렀다.


68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듬해 출판된 「빠삐용Papillon」은 타이밍이 좋았다. 권위주의에 대한 회의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교차하는 시대에 가혹한 처벌을 무릅쓰고 11년 동안 여덟 번 탈옥을 감행한 빠삐용의 사연이 독자의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허구가 아니라 실화라는 점은 감동을 배가시켰고, 그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서점을 찾은 사람들 덕분에 프랑스에서만 150만 부나 되는 책이 팔렸다.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데다 드라마틱하기까지 한 이야깃거리를 영화사가 놓칠 리 없다. 장 피에르 멜빌의 프로듀서이자 도박사 기질이 다분한 로베르 도프만Robert Dorfmann이 재빨리 샤리에르를 찾아가 친구를 자처하며 친분을 쌓았고, 몇 주 뒤 영화화 판권을 손에 넣는다. 장 폴 벨몽도를 흠모하는 사내를 의식한 듯 앙리 베르누이 감독을 물망에 올리면서. 그러나 노련한 프로듀서답게 제작과 판로를 다시 고민한 도프만은 단독 프로덕션보다 할리우드와 손잡는 것이 위험부담을 낮추리라 생각했다. 순간 그의 마음엔 오로지 이름 하나만 떠올랐다. 프랭클린 샤프너Franklin J. Schaffner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소설을 멋지게 각색해 연출한 <혹성탈출>에 베테랑 프로듀서도 반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역시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인간의 이야기 아니던가.


일사천리로 프랭클린 샤프너가 메가폰을 잡기로 결정하자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감독과 콤비였던 제리 골드스미스Jerry Goldsmith 때문이었다. 특이하게도 <빠삐용>은 감독보다 영화음악가가 먼저 정해졌다. 내정된 작곡가는 미셸 르그랑Michel Legrand. <암흑가의 세 사람>을 위해 작곡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녹음까지 마쳤으나, 고문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음악가 사이에 원성이 자자했던 장 피에르 멜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연 다른 작곡가의 스코어로 바꿔버렸던 것.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작업을 끝마친 르그랑은 멜빌의 프로듀서였던 로베르 도프만에게 소송을 걸 참이었다. 미리 <빠삐용>의 영화음악을 맡겨 섭섭한 음악가를 달래려 했던 도프만의 계산은 어긋났고, 몇 년 전 할리우드로 진출한 르그랑도 지인인 골드스미스의 등장에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기 드문 신사였던 르그랑이 조용히 물러서면서 일단락됐지만 그의 아쉬움은 오래갔다.


자유분방한 영혼을 지닌 제리 골드스미스는 평생 수많은 감독과 작업했고, 그중 두 사람과의 호흡이 두드러진다. 1963년에서 87년까지 일곱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든 프랭클린 샤프너, 그리고 1984년에서 골드스미스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크고 작은 영화와 미니시리즈로 인연을 맺은 조 단테Joe Dante다. 샤프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스트리퍼Stripper>가 골드스미스와 그가 처음 합을 맞춘 작품이지만,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은 CBS 방송국에 몸담았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풋풋한 20대였음에도 발군의 솜씨로 방송 관계자에게 눈도장을 찍은 제리 골드스미스는 영화감독이 된 프로그램 연출자들로부터 종종 러브콜을 받았고, 샤프너 역시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영화에 그를 초대했던 것. 


프랭클린 샤프너는 전적으로 제리 골드스미스의 실력을 믿었던 것 같다. 스코어의 방향이나 컨셉만 정해주고, 나머지는 작곡가가 자유롭게 창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곡에 방해가 될까 싶어 녹음 전까지 완성된 음악을 들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네 번째로 호흡을 맞춘 <빠삐용>도 다르지 않다. 감독이 원한 음악 컨셉은 몽마르트에서 들릴 법한 프랑스 색채. 그러나 시각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빠삐용>에서 프랑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완벽한 허구도 아니지만 완전한 사실도 아닌, 반자전 소설에 가까운 샤리에르의 수기를 영화로 옮기면서 샤프너는 이야기의 앞과 뒤를 자르고 몸통에 해당하는 부분만 취했다. 수감되기 전 빠삐용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어디에 살았는지, 가족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그가 탈출에 성공했는지도 확실히 보여주지 않는다. 드가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사내의 희미한 실루엣만 보여줄 뿐. 프랑스풍 음악은 영화가 생략한 빠삐용의 고향을 짐작게 하고, 그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귀띔한다. 결국 샤프너가 주문한 음악은 향수이자 자유의 멜로디인 셈이다. 프렌치 왈츠는 골드스미스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빠삐용>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ㅣ Quartet Records(2017)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빠삐용>의 애달픈 왈츠는 메인 테마나 다름없지만, 영화에 온전한 멜로디로 등장하는 횟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제리 골드스미스와 함께 작업하지 못할 때는 그가 바쁠 때'라며 작곡가에 깊은 애정을 보인 샤프너는 사실 영화에 음악을 많이 쓰는 감독이 아니다. 하나의 테마곡을 이리저리 변주하고 반복해 지겨워지는 음악을 싫어했던 그는, 지나치게 많은 변주로 영화에 부담 주지 않는 골드스미스를 그래서 좋아했다. 두 시간 반의 러닝 타임을 가진 <빠삐용>을 위해 작곡한 영화음악의 분량은 모두 40여 분 남짓. 그마저도 다 사용되지 않고 생략되거나 부분적으로 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된 뒤 21분이 지나서야 영화에 처음으로 음악이 깔린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삐용>은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과잉보다 정량에 가까운 골드스미스의 담박한 스코어, 그리고 음악이 있어야 할 자리도 다시 생각해 넣는 샤프너의 연출이 맞아떨어져 서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교도소의 험악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Camp'는 작곡가와 감독의 그런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는 곡. 불안한 화음과 바싹 긴장한 플루트의 떨림으로 시작되는 스코어는 긴 항해와 죽음의 공포에 지친 죄수들의 발걸음을 장송곡 같은 리듬에 실어낸다. 어느샌가 무거운 리듬 위에 슬그머니 얹힌 왈츠의 희미한 멜로디. 애초 제리 골드스미스는 곡조의 중심이 될만한 조성(調性)이 없는 무조로 이 곡을 작곡했으나, 샤프너는 거기에 애처로운 아코디언 선율이 더해지길 원했다.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라며 주저하던 작곡가는 감독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톤 다운한 왈츠의 선율을 슬쩍 보탰고, 이질적인 두 음악이 차지게 어우러지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샤프너 감독이 뜬금없이 주문했던 프랑스 색채의 음악도, 아코디언도 처음엔 알 수 없는 암호 같았지만 제대로 그를 해독한다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샤리에르가 쓴 책이 투박한 표현보다 내용에 좀 더 매력이 있었다면, 샤프너가 연출한 영화는 내용보다 극적인 표현에 방점이 찍힌다. 작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센터피스처럼 <빠삐용>의 주제를 압축한 초현실적인 꿈은 그중 백미. 'Dream'은 바로 그 장면에 흐르던 스코어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재판관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순간 드디어 모습을 내보이는 프렌치 왈츠는 안타깝고 쓰라린 감정을 일거에 몰고 온다. 제리 골드스미스는 오직 두 대의 아코디언으로 이 테마곡을 완성했다. 도입부의 아코디언이 묵직한 저음으로 사내의 고달픈 마음에 가닿는다면, 스스로 죄를 인정하며 힘없이 고개 숙일 때 고음으로 도약한 아코디언 선율은 뒤늦게 깨달은 그를 죽비처럼 내려친다. 같은 멜로디에, 같은 악기지만 사운드의 미묘한 차이로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솜씨가 지금도 신선하다. 


고난의 연속인 빠삐용이 사냥꾼에게 좇기다 과지라 부족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게 될 때 이국적인 멜로디가 고단한 마음을 감싼다. 제목마저 낭만적인 'Girl From the Sea'. 8분가량 대사 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영화음악도 같은 분량이 소요된 이 시퀀스는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빠삐용의 살벌한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섬처럼 느껴진다. 목숨을 위협하는 긴장스러운 현악기 대신 부드러운 목관악기가 주조를 이루는 가락은 평화롭고, 프랑스 색채 대신 카리브해 토착민의 여유가 담긴 리듬은 느긋하기 그지없다. 훗날 골드스미스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제작 비화에 따르면, 샤프너는 미지의 원주민(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에게 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을 음악에도 반영해달라고 얘기했지만, 카리브해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긴 작곡가는 감독의 부탁을 까맣게 잊은 채 서정적인 선율로 만들고 말았다고. 거장의 알려지지 않은 귀여운 실수다.


원주민과 함께 했던 꿈결 같은 시간이 덧없이 사라지고, 다시 독방에 갇힌 빠삐용은 5년 만에 풀려나 추방된다. 살아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악마 섬으로. 그러나 드가와의 반가운 재회도 잠시, 결코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사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탈옥을 준비한다. 두 부분으로 나뉜 'Farewell'은 영화의 절정이자 결말인 엔딩 시퀀스를 장식하는 스코어.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는 짤막한 메인 테마가 이별을 예감하는 드가의 얼굴 위로 잠깐 스치고, 이내 빠삐용이 절벽에서 뛰어내리자 징과 심벌즈가 물보라처럼 요란스레 울려 퍼진다. 그리고 잠시 지속되는 침묵. 눈물과 미소가 뒤섞인 드가의 표정으로 사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조류를 벗어나 망망대해로 빠져나가는 뗏목처럼 아코디언으로 시작해 플루트로, 그리고 다시 현악기와 하프시코드의 앙상블로 갈아입은 낯익은 선율은 이제 더 이상 애처롭지 않게 들린다. 아직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빠삐용의 우렁찬 목소리처럼 가장 왈츠다운 최후의 리듬이 힘차게 넘실거린다. 세찬 파도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듯이.


+) <빠삐용>의 영화음악은 제리 골드스미스가 작곡했으나 프로덕션은 프랑스가 맡았다. 음악 프로덕션은 프랑스의 유명 작사가 자크 플랑트Jacques Plante가 담당했는데, 그는 영화가 개봉하자 메인 테마에 노랫말을 붙여 'Toi Qui Regarde La Mer'를 발표했다. 이 곡을 영어로 번안한 것이 바로 'Free as the Wind'. 사운드트랙 앨범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린 잉글버트 험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버전은 1974년 그의 싱글에 수록된 곡이다.  




01 [02:20] Theme From Papillon
02 [03:02] The Camp
03 [02:57] Catching Butterflies(Extended Version)
04 [01:49] The Dream
05 [03:51] Hospital
06 [01:50] Papillon(Theme Version)
07 [03:59] Freedom
08 [02:07] New Friend
09 [02:30] Antonio's Death
10 [08:18] Girl From the Sea(Film Version)
11 [01:03] The Pearl
12 [04:38] Reunion
13 [00:51] The Garden
14 [01:30] Cruel Sea

15 [00:59] Farewell - Part 1
16 [02:25] Farewell - Part 2
17 [02:45] End Title


Source Music

18 [00:44] Field Drums
19 [01:50] Triumphant Parade
20 [02:49] Faust: Dance of the Nubian Slaves
21 [02:12] Faust: Cleopatra's Variations
22 [02:13] Faust: Phryne's Dance

23 [01:52] J'ai Deux Amours
24 [03:16] Sous les Toits de Paris


Bonus Tracks

25 [01:44] The Dream(Alternate)

26 [03:59] Freedom(Alternate Take)

27 [03:10] Free as the Wind_ Englebert Humperdin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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