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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장 Dec 15. 2021

018. 일몰을 바라보는 자세


오랜만에 제주였다. 일몰을 보기 좋은 바다 앞으로 가 해가 떨어지는 장면을 눈이 아프도록 바라봤다. 해 지는 시간에는 하루 중 가장 감상적인 기분이 된다. 너무 바쁘던 어떤 시기엔 3개월이 넘도록 일몰을 보지 못했던 적도 있다. 몇 달만에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오후, 문 틈으로 들어오는 오렌지 색에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 해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 걱정, 고민들의 시간이 좋다. 해가 넘어가고 나면 어둠과 함께 걱정과 고민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해를 바라보는 동안은 마음껏 고민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하는 고민이 나만의 것이라 생각하고 일몰 시간만 되면 고민을 한껏 품어선 해를 바라봤다. 고민과 스트레스에서 허우적대는 시간에 가장 위로가 되는 건 뜨겁게 비추는 오렌지색 태양이었다. 지금은 고민이 있어도 누구나 이 시기엔 이런 고민을 하겠지, 이런 일을 할 땐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겠지, 이런 상황엔 누구나 화가 나겠지 생각하며 넘어가게 되어서지 근래엔 해를 바라보고 있어도 붉은 하늘에 태워 보낼 고민이 떠오르진 않는다. 어린 시절의 아련했던 추억들과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가볍지만 세상을 짊어진 것 같던 그 고민들의 무게에 울던 때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터지기도 하는 요즘, 일몰의 시간은 나의 하루를 정리하는 삶의 습관 같은 시간이 되었다. 제주에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직선으로 뻗은 수평선 위로 떨어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누군가 말했다. 


 

"일몰이 마치 우리 같다."


해가 절반쯤 잠겼을 때였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들이 말했다. 절반쯤 잠긴 해가 40, 50을 지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들은 우리의 시기가 지금 딱 저 즈음일까 말하며 저렇게 반쯤 담긴 태양처럼 세상을 붉게 물들일 무언가를 하고 있을까?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대의 막연함에서 20대의 치기 어림, 30대의 자기 확신을 지나고 나서 시작하는 40대의 대화였다.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을 확립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조금은 명확해진 이 시기에 나는 앞으로 더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해가 동그랗게 떠 있는 시간을 바삐 보내고, 저무는 해와 함께 한숨 돌릴 수 있는 이 시간에서야 지금의 나에 집중하게 된다. 


 세상을 진하게 물들이고 사라지는 태양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조금조금씩 실천해 나가고 있는 요즘, 이 일들이 어느 시점, 어디선가에는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하고 싶은 것, 더 구석구석에 힘과 응원을 보내고 싶어 진다. 내가 가진 자원과 힘은 적은데, 욕심만 많아져 정신없이 바쁘다. 태양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비출 수 있는. 역시, 욕심이 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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