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뽑고 가지를 쳐낸다.
2격세지변하는 업무환경 이전에 이직이란 것은 그 자체로 과연 무엇일까. 우리 집에는 벌써 몇 년째 기른 식물들이 있다. 스킨답사스. 홍콩야자. 파키라와 같은 친구들이 빠듯한 실내 공간에 제법 자리를 차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그저 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식물들일뿐이었는데 그 친구들의 생장과 쇠락을 오랜 시간 바라보다 보니 이제는 그들의 변화가 내 삶에 투영되어 보이고는 한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이 오랫동안 일해온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식물을 기를 때 해야 하는 행동들, 또는 그 식물이 인간의 손길에 의해 겪어야 하는 변화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직이란 결국 자신의 뿌리를 뽑는 진통의 과정이다. 그리고 새로운 터전에 나를 다시 심는 적응의 과정이다. 분갈이를 할 때면 흙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털어내도 잔뿌리가 조금씩 뜯기기 마련인데 그런 것처럼 이직이란 하나의 생명체로서 불편이나 아픔을 겪는 과정이다. 뿌리를 내린 기간이 길수록 그 과정에는 더 깊은 조심과 더 많은 신경 씀이 필요하게 되고 커질 대로 커진 본체를 지탱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시간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된다. 모든 것이 혹독한 겨울에 분갈이를 권하지 않는 이유는 고난의 시기를 겪고 있는 한 생명체에게 뿌리를 드러내는 추가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는 판단이다.
이직이란 가지를 쳐내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의 내가 가지고 있던 일에 대한 태도, 습관, 판단 과정, 사고 체계들이 새로운 곳에서 더 이상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음을 느낄 때 스스로의 가지를 잘라 버린다. 그리고 그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새로운 의식의 가지들이 자라나고 그에 기반한 무리 없는 행동 패턴들이 형성될 때까지 앙상한 자태를 유지하며 풍파를 맞는다. 그것은 가끔 초라한 감정이 되기도 하여 새로운 경험이 쌓이고 유용한 자질이 형성될 때까지는 그 초라함을 그저 그냥 견뎌내야 한다.
식물을 길러보면 딱 화분의 크기만큼만 그 식물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잘 자라다가도 잎이 일정이상 무성해지면 새로운 잎이 생길 때마다 기존의 잎이 생명력을 잃고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전의 일터에서 나는 더 이상 변화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때문에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 퇴직을 했다. 그건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동안 깊고 촘촘히 내린 뿌리를 스스로 뽑아 버리는 결행이었다. 하지만 헤매임의 끝에 새로운 정착지가 된 행정의 숲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촘촘한 공간이었고 가끔은 내 선택이 옳은 일이었는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그 적응의 과정은 외롭기도 하고 힘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