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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Aug 13. 2018

bartender 29

마지막을 향하여...1

어느 순간, 아주 우스웠던 사소한 말 나눔을 기억해 냈다.


비교적 젊은 손님이었던 그는, 자신의 높은 스펙 탓에 연애를 할 수 없음을 불평하고 있던 중이었다. 

삼십대 중반에 고시를 패스하여 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그럴듯한 집안의 장남이기도 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직업 관계상 말끔한 양복 차림에 손목에는 고가의 시계가 그의 신분의 증명인양 번쩍거렸다.


“나를 좋다고 하는 여자들을 믿고 만날 수가 있어야죠. 직업 이야기부터 하면 눈빛부터 달라지니까. 내가 의심이 많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만나면 다들 그런 것만 관심 있어 하니까요.”


뭐라 답해야 할까, 당신의 조건 만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 같이 핏대 올려가며 성토해 주어야 하나, 아니면 위로를 해주어야 하나. 둘 다 해 드려야 하나.

남자는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원하는 대답과 분노와 동경, 또는 동정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나는 대답해 줄 말이 없다. 영리한 그가 내게 보내는 시험지 같은 질문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자신이 늘 듣던 대답과는 다른 것을 나는 듣길 원해. 너는 그래도 제법 말 상대가 되는 바텐더잖아. 나를 좀 재미있게 해 줘봐. 실망시키지 말고.


“조건을 보는 만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은 조건의 여성분을 만나보세요. 자신도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면 상대에게서 꼭 그걸 찾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여자들은 하나같이 여왕벌 기질이 있죠. 딱 질색입니다.”


나도 모르게 환멸의 표정이 새어나오려는 걸 막기 위해 애쓴다. 더더욱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 싫었다. 


“그럼 설명해 주세요. 좋은 집안, 무슨 무슨 차를 몰고, 직업이 변호사이고 그런 거 말고 본인은 어떤 사람인지. 그런 요소들을 다 빼고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세요. 그걸 상대방에게 알리는 게 먼저 아닐까요?”


그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고,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알고 있다. 자신의 직업과 소속, 사회에서 마련해 준 이름표를 떼고 나면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의자가 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물 컵이 물을 담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기를 쓰고 취직하여 어느 회사의 대리, 과장입니다. IT 종사자입니다. 건축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영업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의 나는 무엇일까? 바텐더로써 돈을 벌고 살고 있는 나는 바텐더를 뺀 어떤 존재일까? 인간, 여자, 생물학적 분류를 제쳐두고 나는 무엇으로 설명되는 존재일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질문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는 왜 괴로운 것일까. 그렇게 한 밤을 다 새워서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도, 새벽이 지나 아침 햇살을 외면하며 또 다시 술로 채워야 밀어낼 수 있는 고통과 자기 연민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 어떤 진상이 와도 지지 않을 말주변과 욕설로 맞서는 용감한 병사같던 그녀들은 왜 아주 작은 말 몇 마디에 끝내 무너지는 것일까?


그리고 이 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왜 괴로워 하는 것일까? 처음 보는 어린 여자에게 부부관계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어린 아이에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로 자기 인생을 꾸며대는 손님들. 그들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내가 그 변호사 손님에게 물었던 것처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뭐라고 답했을까? 아니 대답할 수 있었을까?


이 곳이 그저 술을 마시며 젊은 여성의 향기를 음미하고 성적인 어떤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자리였다면 나는 이렇게 오랜 기간 바텐더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통칭 모던 바, 토킹 바라는 이름의 영업형태도 이렇게 오랫 동안 성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곳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갈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맞지 않는 질문을 하고 그리고 석연치 않은 대답으로나마 위로를 듣는 곳이다. 

‘변호사인 내 직함을 보고 좋아하는 여자들이 싫습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한다. ‘바텐더로 보이는 내 모습은 진짜가 아니야. 나는 너희들이 보는 그런 모습의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만약 스스로의 모습을 사회에서 정의한 목적에서 벗어나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덜 괴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 존재의 의미가 바텐더로 끝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이러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의 비난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가엽게 여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고, 저러한 깨달음이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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