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대담집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후기
가장 최근에 개봉한 이유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연기가 많은 이들의 기억을 지배하겠지만, 사실 그에 앞서 인간의 감정을 철저하게 배재한 히스레저의 조커가 있었고, 더 이전에는 익살스러우면서도 괴짜 예술가 느낌이 나는 잭 니컬슨의 조커가 있었다.
잭 니컬슨이 주연한 영화 <매트맨(팀버튼 연출)>에는 하루라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악당 조커가 고담시의 미술관으로 침입해 수많은 명화들을 파괴하는 장면이 나온다. 렘브란트, 드가, 르느와르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훼손하던 조커는 한 그림을 지나치며 자신의 부하에게 명령한다.
“이 그림은 맘에 드는군, 남겨둬”
악의 화신 조커의 시선을 끈 작품은 다름아닌 아일랜드 출신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회화 1946>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미술과 친숙하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화가지만 그의 작품은 이미 2001년도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47억원에 팔렸고 이후 847억원에 재판매 될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프랜시스 베이컨은 동명의 철학자 집안의 후예로 중산층 부모 밑에서 비교적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어릴적 경험했던 동성애와 성적 학대로 인해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일찍이 학교를 중퇴하고 무학으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서른이 되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평단의 비난에 시달리며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폭으로 구성된 <십자가 책형을 위한 습작>으로 서서히 평단의 인정을 받게 된다. 이 책은 그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데이비드 실베스타와 나눈 여러차례의 대담을 엮은 대담집이다.
책의 제목이 무척 도발적이다. 정육점의 고기라니. 자신의 존재와 정육점의 고기를 비교할 사람이 있을까. 베이컨에게 육체는 고통의 근원이다. 그의 그림은 무척 어둡고 공포스럽다. 고깃덩어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흥건하고 인물은 무엇으로 짓이겨진 것 처럼 비틀려있다. 피카소가 일시점에서 관찰되는 대상의 면면을 다각도로 묘사했다면, 베이컨은 시간을 두고 변형되는 인물의 운동성을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전후 세대의 작가들 특유의 시대적 공포가 그의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배어 나오지만 유독 베이컨의 작품에선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육체가 나열된다.
그는 특히 고통을 견뎌내는 인물의 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입은 드러난 신체에서 유일하게 깊이를 가진 기관이다. 벌어진 입 안으로 감추어진 암흑의 세상은 또 하나의 존재론적 절망이 읽힌다. 시인 기형도가 본 검은 입 속의 혀처럼 베이컨이 묘사한 입 속의 검은 공간은 저 심연으로부터 끌어오르는 절망적 상황의 은유다.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 영화 <전함 포템킨>에 등장하는 오뎃사 계단에서의 학살 장면과 뭉크의 <절규>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베이컨의 인물은 여타 이미지에서 등장하는 인물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극한의 공포를 보여준다.
철학자 들뢰즈는 그의 그림에 묘사된 대상을 ‘기관없는 신체’라고 정의한다. 고기는 명백히 동물의 사체에서 잘라낸 신체의 부분이지만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기관은 생명이 존재하는 순간에 잠시 기능할 뿐 본래적 물질(고기)의 내재성을 벗어날 수 없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묘사되는 입 속의 깊은 공간은 기관과 신체를 오가는 통로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통로로써 입은 고통의 은유일수밖에 없다.
대담집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을 읽으면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며 스스로 고통의 정점에 서고자 했던 베이컨의 그림이 현대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를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