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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환 Jul 21. 2017

잡지 디자이너는
프라다를 입을 시간이 없다

디자이너는 영화 속에서 이런 것을 본다 01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패션잡지 세계의 인물들과 경쟁관계를 실감 나게 그려내어 큰 호응을 얻었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이 영화는 실제 <보그>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배경은 뉴욕이다. 왜 뉴욕이어야만 했을까? 뉴욕은 문화, 예술,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디어의 중심지이다. 거대 잡지그룹이자 오랜 경쟁사인 <콘데나스트>와 <허스트>는 맨해튼의 중심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제 주인공들의 무대가 되는 잡지 세계를 디자이너의 눈으로 한번 들여다보자.


뉴욕이 아닌 지방 명문대 출신인 주인공 앤디는 푸른 꿈을 안고 뉴욕으로 상경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결국 신문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패션잡지 <런어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직에 응모를 한다. 패션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앤디는 좌충우돌하며 좌절도 하지만 서서히 패션잡지 산업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장 미란다가 자신의 집으로 책을 가져오는 일을 맡으라고 지시한다. 여기에서 ‘그 책(the book)’이란 무엇일까?


앤디가 첫 출근한 날 선배 에밀리가 거만하게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책이라고 으스대던 책, 

밤 10시 반이나 돼서야 디자인팀에서 넘어오는 책, 

커다랗고 두꺼우며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는 링제본의 책.

더미북을 검토하는 편집장, 퇴근을 해도 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바로 패션잡지 <런어웨이>의 가제본이다. 


편집회의에서 결정된 기획안대로 취재하고 촬영해 디자인팀으로 넘겨진 것을 레이아웃하고 컬러 프린팅 하여 링으로 가제본 한 책이다. 즉 <런어웨이> 다음호의 모든 것이 담긴 더미북이다. 거기에 각기 다른 담당 파트의 수정된 부분에 포스트잇이 붙여져 편집장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책을 편집장이 새벽까지 검토하고 아침에 출근하며 앤디의 책상 위에 던져 놓으면 각 파트 담당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분철한 후 자신의 꼭지에 체크된 수정사항대로 원고와 사진을 교체하거나 재촬영해 디자인팀으로 넘긴다. 이때가 어림잡아 늦은 오후이고 디자인팀에서 디자인이 마무리되는 때가 밤 10시 반 정도인 것이다. 이 과정을 인쇄 직전까지 끝없이 반복한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일이겠는가. 물론 완성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잡지회의 장면, 회의실 뒷쪽에 레이아웃 시안 보드가 보인다

영화 중반에 편집회의 장면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는 놀랍게도 겨울호를 만드는 지금 2월호 모델 섭외와 여름호 기획까지 언급된다. 실제로 보그는 발행 3개월 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번 시즌이 아닌 다음 시즌을 먼저 취재하기 때문이다. 그달 그달 취재해서 제작하는 한국적 상황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발행부수만 해도 천지차이다. 국내에서는 발행부수가 수만 부에 불과하지만 보그의 경우는 100만 부가 넘어간다. 뉴욕 패션위크가 벌어지는 9월호의 부수는 몇 배로 뛰기도 한다. 이런 규모의 경제가 세계 최고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잡지 디자이너의 밤을 불사르는 야근은 <보그>도 어쩔 수 없다. 모든 작업 과정의 끝에 디자인 작업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정신없이 바쁜 장면은 영화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나이젤의 작업 장면을 보면 그의 등 뒤로 한 달 동안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일정표가 모니터에 떠 있다거나(악마는 프라다...), 편집장의 컨펌을 받기 위해 몇 개의 시안 보드를 들고 안달하는 디자이너(완벽한 그녀...) 등이 그것이다.

디자이너는 A,B를 만드는 숙명이라도 타고 났을까?


앞서 말했던 링제본 책은 <런어웨이> 잡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1급 비밀이다. 그런 만큼 신뢰할 수 없고 어설픈 비서에게는 맡길 수 없는 중책인 것이다. 만약에 이런 정보가 상대편 잡지 쪽에 넘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2004)에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매번 경쟁지와 표지모델과 커버스토리가 겹친다면 정말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제나 링크(제니퍼 가너)가 편집장을 맡고 있는 패션잡지 <포이즈>의 정보가 경쟁지 <스파클>로 계속해서 새어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겪는다. <스파클>은 <포이즈>와 동일한 기획에 한발 더 앞선 내용을 다룬다. <포이즈>가 표지모델 제니퍼 로페즈를 써서 '그녀의 10가지 비밀’을 내놓으면, <스파클>은 동일한 표지에다가 한 술 더 떠 ‘11가지 비밀’로 다루는 식이다. 가판대에 나란히 놓여 비교되며 판매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치명적이다. 잡지사의 흥망이 달린 중요한 일이랄까. 하지만 영화와 달리 패션잡지의 표지모델이 경쟁지와 똑같은 경우는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당일치기가 아니라 사전에 섭외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잡지사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모델 자신이 같은 타깃층의 잡지에 표지로 등장하는 건 도덕적 책임에 의해서라도 사전에 거절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것은 영화잡지나 시사잡지이다. 당시의 최고 이슈가 되는 인물을 표지로 하기 때문에 겹칠 확률이 높다. 이때 그 인물을 어떤 시각으로 다루어 변별성을 주느냐가 디자인팀의 고민이다. 실제로 과거 노태우 대통령 퇴임 후 비자금 사건 때 시사주간지의 표지가 충돌했던 적이 있다. 두 시사주간지의 표지가 만 원짜리 지폐의 세종대왕 얼굴에 노태우 대통령 얼굴을 합성했던 것이다.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겹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두 시사지가 가판대에 걸려 있는 모습에 보는 내 마음이 다 졸아들 정도였으니 디자인을 한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이 교훈 덕분에 표지가 겹칠 만큼 큰 이슈의 표지를 디자인할 때는 경쟁지 디자이너는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해 왔고 이번 이슈에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데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잡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이며 다양한 상황을 전제로 판단한 콘텐츠의 적합한 시각화 작업이다.


자신이 만든 잡지를 경쟁지보다 잘보이게 몰래 재배치하는 욕심


영화 <완벽한 그녀에게...>를 보면 주인공이 길거리 가판대에서 자신이 만든 잡지 위에 전시된 경쟁지를 몰래 들어내서 구석으로 가져다 놓는 장면이 있다. 시사주간지 디자인을 하던 시절 광화문 가판대에서 내가 저질렀던 행동이 떠올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잡지 디자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덕목 한 가지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매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필자 소개 : 장성환(pigcky@gmail.com)

현재 203인포그래픽연구소 대표 | <리더스다이제스트>, 연합뉴스 그래픽뉴스팀 창설, <주간동아>, <과학동아> 등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다가 2003년 홍대앞에서 203 X 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이후 2009년 홍대앞을 기록하는 동네잡지 <스트리트H>를 창간해서 현재 12년차에 이르고 있다. 2012년 인포그래픽 연구소를 설립하고 <윤디자인연구소 갤러리>에서 현직 언론사 인포그래픽 담당자들과 인포그래픽 그룹 전시회를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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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20 말로피에 국제 인포그래픽 어워드 3년 연속 동상

2019~2020 싱가폴 아시안 미디어 어워드 인포그래픽 금상, 동상 수상

2020 레드닷 브랜드&커뮤니케이션부분 위너

2020 디자인대상 공로부문 대통령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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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X 인포그래픽연구소 http://203x.co.kr/

홍대앞 동네잡지 <스트리트H> http://street-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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