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영화 속에서 이런 것을 본다 03 : 돈 세이 워드
1991년 뉴욕의 한 은행이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현금이 아닌 붉은 다이아몬드 한 알. 강도들은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일당 중 한 명이 다이아몬드를 몰래 빼돌리면서 두목은 배신에 치를 떤다. 영화 <돈 세이 워드_Don't say words>(2001)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10년 후인 2001년 뉴욕 어퍼 웨스트의 한 정신과 의사 상담실. 마지막 상담을 끝내고 가족과 추수감사절을 보낼 생각으로 즐겁게 퇴근하는 네이선 콘라드(Michael Douglas) 박사. 그런 그에게 시립 정신병원 상담의인 친구 루이스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온다. 18세의 중증 신경정신증 소녀 엘리자벳과의 면담 요청이다. 당장 증세가 호전되지 않으면 평생을 병원에 수용된 채로 지내야 하니 이 소녀를 구제해달라는 것.
네이선은 친구의 부탁을 거절 못 하고 시립 정신병원으로 향한다. 공허한 눈빛의 엘리자벳은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좀처럼 입을 열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련하고 예리한 정신과 의사인 네이선은 이 소녀가 긴장증 환자인 척 연기를 하고 있음을 한눈에 간파해낸다. 다음 면담을 약속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온 네이선. 그런데 이튿날 아침, 자신의 어린 딸 제시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납치범의 전화를 받는다. 납치범은 딸을 돌아오게 하고 싶다면 엘리자벳으로부터 어떤 번호를 알아내라고 협박한다. 네이선은 딸의 소지품을 챙겨 정신병원으로 되돌아가 굳게 닫힌 엘리자벳의 마음을 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그는 엘리자벳과 함께 정신병원을 빠져나와 그녀의 트라우마가 시작된 차이나타운의 커낼 스트리트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이 지하철역에는 영화 속 심각한 이야기 전개와는 별개로, 유심히 눈여겨봐야 할 디자인적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다.
오늘날 26개 노선과 468개 역으로 이루어진 뉴욕의 지하철은 1904년 처음 개통되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1968년, 뉴욕 지하철의 사인 시스템을 정비하는 디자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와 그의 파트너 밥 누다(Bob Noorda)가 세운 디자인 회사 ‘유니마크 인터내셔널’이 작업을 맡았다.
마시모는 초기 모더니즘 디자인의 스타들 중 한 사람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헬베티카>에서 인터뷰이로 등장할 만큼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 그가 디자인한 아메리칸 에어라인(AA)의 심벌은 지금도 수정 없이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마시모 비넬리가 디자인한 뉴욕 지하철의 사인 시스템은 현재 기본 서체로 헬베티카 미디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으니, 바로 디자인 저술가인 폴 쇼(Paul Shaw)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시모와 파트너 밥 누다는 헬베티카 서체가 어떻게 오늘날 뉴욕 지하철 사인 시스템의 기본 서체로 적용되었는지 그 경위를 정확히 기억 못 한다고 한다.
또 폴 쇼는 유니마크에서 디자인한 뉴욕 지하철 사인 시스템의 기본 서체는 애초에 헬베티카가 아니라 스탠더드(악시덴츠 그로테스크가 영국과 미국에서 불리던 이름)였다고 주장한다(실상 1957년에 세상에 나온 헬베티카는 1950년에 나온 악시덴츠 그로테스크의 영향을 받은 서체다). 원래 마시모는 새로 등장한 헬베티카의 타이트한 자간 조절에 매료되었고, 당연히 자신이 디자인하는 뉴욕 지하철의 사인 시스템에도 적용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당시(1968년) 미국에는 헬베티카가 수입조차 안 된 상황이었고, 사인 제작 업자들은 추가 비용이 들어가는 신서체 구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업체들이 이미 보유한 서체들 중 헬베티카와 가장 유사한 스탠더드 서체로 사인물을 제작하게 된 것이라는 게 폴 쇼의 추론이다. 실례로 뉴욕에는 아직도 스탠더드 서체가 적용된 사인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헬베티카가 점차 대중적 인기를 얻어감에 따라 사인 제작업체들도 자연스레 헬베티카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계기나 논의도 없이 슬그머니 스탠더드 대신 헬베티카로 사인물을 제작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1989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디지털화된 헬베티카 서체만을 적용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디자인의 수도라고 불리는 뉴욕에서도 이런 ‘얼렁뚱땅’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마시모의 사인 시스템 디자인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심지어 MoMA(뉴욕 현대미술관)에도 영구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안타까운 사실을 하나 보태고자 한다. 영화 속 지하철역 입구의 노선 번호 표시가 낯익지 않은가? 정원 위에 숫자와 알파벳으로 호선 구분을 한 디자인은 서울 지하철의 그것과 유사하다. 서울의 1호선이 개통된 시기는 1974년이다. 1968년 적용된 뉴욕의 지하철 사인 시스템 디자인을 차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의 표식이 초창기 빨간 원과 흰 숫자였던 것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자, 지하철역의 미스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영화 속 네이선과 엘리자벳에게로 돌아가자. 커낼 스트리터 역 안에서 10년 전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엘리자벳. 그녀의 아버지는 10년 전 은행 강도단의 일원으로, 두목을 배신하고 다이아몬드를 숨긴 장본인. 출소한 일당에 의해 지하철역 안에서 폭행당하고 결국 지하철 선로 밀쳐져 살해되었다. 다이아몬드는 어린 엘리자벳의 인형 '미쉬카'의 속에 숨겨져 있었고, 엘리자벳은 무연고자 묘지에 묻힐 아버지의 관 속에 그 인형을 집어넣었다. 아버지가 묻힌 곳을 물어보는 박사에게 엘리자벳은 지하철 구내에 설치된 대형 지하철 노선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킨다. 그곳은 하트 아일랜드. 문제는 현재 뉴욕 지하철 노선도에는 이곳이 없다는 것이다. 하트 아일랜드뿐 아니라 그 옆의 시티 아일랜드도 없다. 2010년에 리뉴얼된 노선도에만 시티 아일랜드가 표시되고 있다. 어찌 된 일일까?
그렇다면, 영화 속 노선도에는 표시된 섬이 실제 노선도에는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티 아일랜드 옆의 하트 아일랜드는 실제로 존재한다. 다만 노선도에서 누락되었을 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2010년 리뉴얼된 노선도에 시티 아일랜드는 표시되었으면서, 그 옆의 하트 아일랜드는 왜 누락되었나 하는 점이다. 교통편이 중심이 되는 지하철 노선도이다 보니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시티 아일랜드까지는 교통편이 있고 하트 아일랜드에는 없기 때문이다.
뉴욕의 지하철 노선도에는 지하철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시모는 지하철 사인 시스템과 노선도를 함께 디자인했는데, 그의 노선도는 1972년도에 배포되었다가 1년 만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는 현재의 모습과 유사한 형태로 바뀌었다. 이 사실에 주목해보자.
마시모가 디자인한 뉴욕의 지하철 노선도는 ‘도상적 지도’ 범주에 속한다. 이와 달리 현재 사용되는 노선도는 ‘지형학적 지도’ 범주에 속한다. 도상적 지도는 지리적 위치와 상관없이 정보 중심으로 디자인된 것으로 1933년 헨리 찰스 벡(Henry Charles Beck)이 디자인했던 영국 런던의 지하철 노선도가 대표적이고 마시모 또한 이를 레퍼런스로 삼았던 듯하다. 메트로 시티인 도쿄와 서울의 노선도 역시 도상적 지도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절제된 디자인이 특색인 마시모의 노선도는 배포 이후 논란에 휩싸였다. 수직, 수평과 45도 사선으로만 디자인되어 몇몇 역의 위치가 실제와 다르고, 바다의 색을 블루가 아닌 베이지로 표현해 혼란을 야기한다는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다. 그 결과 마시모의 노선도는 1년 정도밖에 사용되지 못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맨즈 보그> 2008년 5월호 부록으로 마시모가 다시 디자인한 노선도가 발행되었다는 것이다.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바다 색을 미색에서 밝은 청색으로 바꾸는 등 좀 더 개선된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뉴욕시와 연계된 공식 프로젝트가 아니었기에 디자인적 해프닝에 그쳤지만, 이런 해프닝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마시모의 노선도가 현대적이고 아름답다는 방증일 것이다. 새롭게 개선된 마시모의 노선도는 뉴욕 지하철 웹사이트에서 노선변경 운행정보를 알리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모더니즘 디자인 거장 마시모의 대표작인 뉴욕 지하철 사인 시스템. 그 명성은 마치 노장 디자이너의 신화처럼 여겨지지만, 기본 서체 문제와 지하철 노선도의 오류 같은 부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시모의 노선도가 이런 기본적 오류를 내포하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아름다운 뉴욕의 지하철 노선도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뉴욕 노선도 사례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디자인적 교훈은 아름다움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능적인 부분을 간과하면 결코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시모의 DNA는 오늘날 스마트폰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아이폰 앱 가운데 킥 맵(Kick Map)이라는 뉴욕 지하철 노선도 앱이 있다. 이 앱의 노선도는 마시모의 도상적 디자인과 지형학적 요소를 적절히 결합시킨 형태를 가지고 있다.
지하철 노선도는 그 도시의 문화와 디자인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다. 도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녹색의 순환선 야마노테선을 보면서 서울의 2호선을 떠올리고, 뉴욕의 지하철 노선표시를 보고 서울의 1호선을 발견하며 느꼈던 씁쓸함은 잊을 수가 없다. 그에 반해 1933년 디자인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런던의 노선도, 그 영향으로 디자인된 마시모의 노선도는 지금 봐도 정말 아름답다. 우리의 서울 공공디자인에도 세월의 때를 비껴가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
필자 소개 : 장성환(pigcky@gmail.com)
현재 203인포그래픽연구소 대표| <리더스다이제스트>, 연합뉴스 그래픽뉴스팀 창설, <주간동아>, <과학동아> 등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다가 2003년 홍대앞에서 203 X 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이후 2009년 홍대앞을 기록하는 동네잡지 <스트리트H>를 창간해서 현재 12년차에 이르고 있다. 2012년 인포그래픽 연구소를 설립하고 <윤디자인연구소 갤러리>에서 현직 언론사 인포그래픽 담당자들과 인포그래픽 그룹 전시회를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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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X 인포그래픽연구소 http://203x.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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