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서 한국으로. 스물여섯 그래픽 디자이너의 새로운 도전
덴마크에서 보낸 3년은 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서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부대끼며 참 많은 것을 경험했고 느꼈다. 내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들, 생활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통째로 뒤엎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를 보냈다.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는 삶이 아닌, 현재의 중요함을. 얼마나 많은 걸 성취했느냐가 아닌, 휴식과 여유의 중요함을. 잘 해내고 있음에도 항상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되었고, 싫었던 운동을 즐기게 되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물론 이방인으로써 힘든 점도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행복했다.
2018년 3월, 창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러 한국에 왔다. 행복한 나라 덴마크에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한국에 왔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가 갈수록 주변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번듯한 직업을 갖고, 집을 사고, 아이를 낳았다. 자리를 잡는다는건 책임이 생긴다는 거였다. 즉, 자유롭게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거나, 내가 뭘하고 싶은 지만 생각할 수 없게 된다는 거다. 내 인생에도 언젠가 그런 시기가 오겠지만, 지금은 나에게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20대 초반에 업으로 삼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내 평생 직업인지는 다른 걸 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택이 충분히 괜찮다고 해서 다른 시도도 해보지 않고, 인생의 초반에 내린 결정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내 꿈은 'CEO'였다. 고등학교를 한 특성화고의 테크노경영과로 진학하면서, 경영 수업을 듣고 경영 관련 책을 읽으며 생긴 새로운 꿈이었다. 고등학생 때 특허를 내겠다며 아이디어 노트를 들고다녔는데, 그 이후로도 틈만 나면 사업을 구상하고 노트에 적는 게 취미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왕복 2시간이 걸리는 통학이 싫어서 자취를 하겠다며 샐러드 배달 사업을 구상했다. 메뉴와 원가 계산, 운영 방법 등을 준비해 부모님께 멋지게 발표했다가,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디자이너로 꿈을 전향한 후, 약 10년간 디자이너의 삶을 살았다. 디자인과로 진학한 대학교 생활은 정말 즐거웠고, 학업을 마치고 2015년에 덴마크에 가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한 것도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덴마크 디자이너 되기'에서 소개했던 첫 번째 직장은 1년 9개월을 다니고 그만뒀다. 그 이후 이것저것 하며 새로운 일들로 가득한 다이나믹한 삶을 살면서 요핸(나의 최고 절친이자 반려인)과 한국에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갈 준비를 하며 머릿속은 갖가지 아이디어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2017년 가을,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가던 중 요핸이가 불쑥 꿀 이야기를 꺼냈고, 그 해 12월 처음 양봉가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2019년 4월에 정식으로 대니시비키퍼스라는 꿀 브랜드의 런칭을 하게 되었고 이후 정신없이 6개월이 지났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거나 겪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많은 고민과 의사결정, 해프닝으로 가득한 디자이너의 창업일기를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