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같은 하루.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곳은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냥 다른 동네에 놀러 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지다 보니 익숙해지고 적응이 된 것이다. 스페인은 두 번째로 간 것이기도 했고 편안한 사람과 좀 더 여유롭게 일정을 채우다 보니 그런 느낌이 더 강했는지도 모른다. 세비야는 무척이나 작은 도시이다. 그래서 포근하고 따뜻하다.
유럽에는 수많은 대성당들이 있다. 대부분은 정말 대(大) 성당이라 압도적이고 웅장하다. 하지만 세비야의 대성당은 조금 다르다.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고딕양식의 최고라 불리는 만큼 잘 짜여진 자수 같아서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유럽의 건축물은 마치 거인이 조각을 해놓은 것 같다. 목조 건물이건 석조 건물이건 거대한 조각가가 유려하게 깎아놓은 듯 세밀하고 탄탄하다. 건축물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인간이, 한 층 한 층 쌓아 올려서 완성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콜럼버스의 관이 있기로 유명한데 관이 생각보다 작아서 단신이셨나 싶었다. 왠지 콜럼버스라고 하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니까 구척 장신이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나 보다. 워낙 큰 성당이다 보니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도 많고 작정하고 지은 건축물이라 정말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창문의 디테일까지 환상이었던 기억.
성당에 오면 자동 코스로 탑을 올라야 한다. 탑을 오를 때는 항상 힘들다. 끝이 보이지 않는, 좁고 경사진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오를 수도 없다. 앞뒤 사람들의 보폭에 맞춰 열심히 올라야 한다. 그러나 오르고 나면 모든 것을 보상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도시를 아래로 보고 있으면 내가 콜럼버스가 되어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점심을 먹을 곳으로 선택한 곳은 대성당 근처에 있는 핫도그 맛집. 많이 걸었기에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스페인은 정말로 주류의 천국이다. 와인이나 샹그리아도 좋고 생맥주의 종류도 다양해서 물보다 많이 마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한참을 또 걸었다. 스페인 하면 아바르카 AVARCA 샌들이 유명하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로는 까사 에르난즈 CASA HERNANZ 제품을 샀고 내가 신을 샌들은 다른 가게에서 샀다. 발품을 팔아서 득템 하는 게 이거구나! 싶었던 샌들 구매기. 아직도 신발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금색 글리터에 발이 너무 편해서 여름에는 이것만 한 샌들이 없다. 그렇게 샌들을 사고 잠시 쉬려고 근처 스타벅스에 갔는데(유일하게 얼음이 들어간 커피를 파는 매장이므로) 바르셀로나에서 만났던 남매를 다시 만났다. 아주 우연히.
이 정도면 인연을 너머 필연이 아닌가 싶었다. 1차로 갔던 곳은 El Pasaje 이곳도 타파스의 종류도 많고 맛있었지만 반가움을 나눈다고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2차로 갔던 곳에서도 다양한 타파스와 와인과 샹그리아를... 엄청나게 먹고 마셨다. 바르셀로나에서와는 달리 이날 나는 무척 취기가 올라 마지막 기억이 좋지는 않다. 우리는 밤새 버스를 타고 리스본으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버스 안에서 내내 괴로웠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2016. 8. 10. WED
동네 산책을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울 만큼 꽉 찬 일정이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지금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직도 닳지 않은 샌들처럼(그만큼 아껴 신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럽여행의 기억은 닳지 않고 내 안에 머물러 있다. 무려 7년이나 흘렀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그날들이 떠오른다. 그때의 우리는 너무 행복하고 예뻤다. 그리고 사랑했다. 그 힘은 아직도 유효하다. 사랑했던 기억들이 결혼 후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고 있다. 기초공사가 튼튼해야 건물이 견고하듯 우리의 사랑도 유럽여행이라는 기초공사로 단단해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