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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4시간전

시국 일기 (2)

나라 걱정하면서 보낸 열흘

 2024.12.14 (토)


 평소 같으면 여유를 부리고 있을 토요일 오전인데 마음이 바빴다. 오늘은 결전의 날! 요새 다들 응원봉을 들고 나온다는데, 나는 응원봉도 미리 주문한 깃발도 없으니 고전적으로 피켓을 만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아이 방에서 두꺼운 마분지 하나와 열두 색의 매직을 꺼내 들었다.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 앞면에는 “탄핵이 답이다” 뒷면에는 영어로 “YOON OUT"이라고 적었다. 가장자리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별과 간절한 염원을 담은 촛불, 타오르는 분노를 표현하는 불꽃을 그려 넣었다. 글자 하나, 그림 하나에 탄식과 기도를 새겨 넣었다. 지켜보던 아이도 나서서 꾸미기에 동참해 주었다. 그렇지, 이게 살아있는 민주시민교육일세!


 다음은 비장하게 옷을 갖춰 입었다. 어차피 모자를 꾹 눌러쓸 예정이니 머리는 감지 않아도 되겠지. 아래위 모두 발열 내의를 챙겨 입고 양말은 두 개를 겹쳐 신었다. 두꺼운 기모 트레이닝복 셋업을 입고, 모자와 머플러 장갑까지 꼼꼼히 챙겼다. 수족냉증인이라 어그 부츠를 고민했지만 많이 걸어야 할 수도 있다고 해서 운동화를 신었다. 분명히 집에 핫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찾아도 없다. 어쩔 수 없지.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남편과 집을 나섰다.


 서울로 가는 경의선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평소 토요일 낮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이 중에서 몇 명이 여의도로 가는 사람일까, 나처럼 중무장한 사람들을 흘금흘금 쳐다봤다. 홍대입구역을 지나 당산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국회의사당역이다. 역사 안은 짙은 색 롱패딩에 백팩을 멘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 사람이 많고 북적이는 곳을 극도로 싫어하는 터라 압박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차분하고 질서 있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 빈 객차가 도착해 여유 있게 승차했다.


 국회의사당역에 내렸다. 원래 늦게라도 참석하려던 개신교 시국 기도회는 이미 끝났나 보다. 국민의 힘 당사 앞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 내란 공범 국민의 힘 해체”라고 쓴 상여 행렬이 지나갔다. 흰 상복에 누런 삼베 상모까지 갖춰 입고 실제 상여를 운반하듯 곡소리를 내는 퍼포먼스가 눈길을 끌었다. 다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다. 본 집회는 한 시간 뒤부터지만 이미 사람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앉을 자리를 찾을 수가 없어서 국회 의사당대로 중간에 작은 공원 흙바닥에 준비해 간 방석을 깔았다. 진행자의 구령에 맞춰 “탄핵해! 탄핵해!” 구호도 외치고, 발언 중간중간 손뼉도 치면서 환호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 아빠들, 대학생들, 특히 보랏빛 페미니스트 응원봉을 든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나도 연명하고 하나 받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탄핵 표결이 있을 때까지 있고 싶었지만 집에 아이들을 두고 왔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 사이 국회의사당역과 여의도역은 무정차 통과라고 해서 여의도 공원을 지나 여의나루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앞쪽은 앉아 있는 자리와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가 잘 확보되어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사람과 나가려는 사람이 뒤엉켰다. 심약한 나는 이러다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앞서가는 남편을 따라 밀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아무도 화내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서로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지 알기에, 작은 사고도 있어서는 안 되기에 서로 조심하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화장실에 가려고 더 현대 백화점에 들렀다. 들어가는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바깥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방금까지 내가 있던 곳은 춥지만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백화점 안은 공기는 따뜻한데 뭔가 차가운 세련됨이랄까. 얇고 가벼운 옷차림에 한껏 꾸민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나와 남편의 옷차림은 너무나 무겁고 둔탁했다. 밖에서는 당당하게 들고 행진하던 나의 수제 피켓도 여기에선 꺼내면 안 될 불온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얼른 가방 안쪽에 집어넣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길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보이는 풍경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남편 회사 근처 백화점이라 여러 번 가본 곳인데도 오늘은 너무나 낯설어 빨리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기댔는데 나도 모르게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틀어놓은 뉴스에서 “탄핵 가결!”이라고 하기에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지난주와 달리 재적의원 300명 전원이 탄핵 표결에 참여했고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가결이 선포되었단다. 광장은 아니지만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마지막에 국회의장의 마무리 발언을 들으면서 어찌나 울컥했는지.


대한민국의 미래는, 우리의 희망은, 국민 속에 있습니다.

희망은 힘이 셉니다.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 2024. 12. 14 우원식 국회의장 본회의 가결 선포 발언


 나는 이때까지 정치인들이 “민심이 천심이다.” “여론이 무섭다.” “국민들의 뜻을 받들겠다.” 등의 말을 할 때 그저 공허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당리당략으로 투표도 안 하고 회의장을 빠져나가던 여당 국회의원들이 2차 투표 때는 전원 참석으로 투표하는 것을 보면서,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국민의 힘에서 소수지만 이탈 표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기어이 최고 권력자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것을 보면서 깨어있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지난 열흘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생생하게 느낀 시간이었다.


 열흘 전 그날 밤을 다시 떠올려본다.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국회 앞으로 달려간 시민들, 맨몸으로 총을 막아선 여성 대변인, “우리는 오래 살았으니 대열의 맨 앞에 서서 막자!” 했다는 70대 어르신들, 담을 넘는 국회의원들과 필사적으로 군인들을 저지한 국회 직원들,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한 군법무관들, 긴박한 상황에서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며 차분하게 회의를 진행한 국회의장... 모두 제 자리를 지켜주었기에 우리의 소중한 일상도 지켜질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시위에 참여한 직장인들, 아이 손잡고 집회에 참석한 엄마 아빠들, “나라 지키러 나왔다”는 어린이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나온 젊은 여성들, 8년 전 탄핵 집회에는 부모님 따라 온 아이였는데 이제는 어엿한 정치 주체가 되어 참여한 대학생들, 사정상 직접 행동은 못 해도 뉴스를 주시하며 걱정하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니 말할 수 없이 애틋해진다. 분노만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사랑의 힘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과거로의 회귀를 막고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고 믿는다. 국회의 시간을 지나 이제 헌재의 시간이다. 진정한 승리의 날이 도래할 날을 고대하며 다시금 힘이 센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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