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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란 Jul 03. 2024

참새야, 너는 누구의 꿈에 들어갈 거니

선생님 참새가 죽었어요. 

(자원봉사자에게도 호칭은 선생님)


하루에 세 마디 이상 말하지 않는 점잖은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참새 한 마리가 바닥에 죽어 있었다. 지난주 등굣길에도 죽은 참새를 한 마리 보았는데, 아이들이 보면 놀랄까 걱정하면서도 적절한 도구가 없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참새를 무작정 맨 손으로 잡아 옮겨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참새가 사라진 것을 보고 누군가 옮겨주었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2주 사이에 죽은 참새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참새가 많이 아팠나 봐. 하고 둘러대고 생각에 잠긴 듯한 아이의 눈을 유치원 쪽으로 틀었다. 가자, 가서 양치하자.


참새의 집이 어디인지 궁금해해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사람이 다니는 길 위에서 죽을 거라는 상상도 역시 해본 적 없다. 새니까 ‘새답게’ 어디 조용한 숲 속에 가서 눈을 감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죽은 새의 모습은 도로 위에서 죽은 고양이나 고라니의 모습보다 더 낯설었다.


세 번째 죽은 참새를 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새의 집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돌이라도 던진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흙 위도 아니고 이런 보도블록 위에서 죽다니. 쉬는 시간을 맞은 초등학생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옥상에 죽은 새 또 있어요. 어디 둥지에서 떨어져 죽었나 봐요.


짧게 참새의 근황(?)을 전해주고는 제 갈길을 간다.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은 삶보다 어둡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그저 여러 가지 세상 일중에 하나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잘 산다’에는 ‘잘 죽는다’는 것도 포함된 듯하다. 따뜻한 집에서 세끼 식사를 하고 건강걱정, 사람걱정, 돈걱정 없이 형통하게 살다가, 모두가 원하는 ‘자다가 가는’ 순조로운 죽음을 맞게 된다면 그 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이 훨씬 많다는 것을 많이 듣고, 보고,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잘 살고' 싶다.



임신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테스트기의 오류는 천 개 중에 한 개 정도라며, 이렇게 선명하면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이제 심장 소리를 들어보자고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떴지만 곧 선생님 숨소리만 남았다.


계류 유산이에요. 초기에는 종종 있는 일이니 염려 말고, 지금 금요일 오후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수술하기로 합시다. 


예상한 전개가 아니었지. 지금 보도블록 위에서 죽은 참새를 보는 것만큼이나 그랬다. 말없이 집으로 돌아오며 영혼의 내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시체도 안아볼 수 없는 ‘죽음’이었다. 해달씨(남편)는 두 번 살아본 것처럼, 우선 밥을 먹으라고 했다. 죽음도, 삶도 시간을 타고 앞으로만 갈 뿐이다. 그래서 더욱, 시간 속에 남을 아기를 묻어주고 싶었다.


이름도 없던 아가야, 너는 내 말을 들었던 거지? 깊은 밤, 자연배출된 아기집을, 천기저귀를 만들려고 마련해 놓은 소창천으로 감싸서 깊이 자는 해달씨를 깨워 멀리멀리 가서 묻어주었다. 참새처럼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아기는 편안히 자다가 죽었을까.


몇 년 후 진짜 둘째를 낳은 후 선잠이 들면 가끔 꿈을 꾸었다. 항상 똑같은 꿈이었다. 누가 머리맡의 방문을 열고 말을 하는데 얼굴은 없고 목소리만 들렸다.


엄마 왜 나는 안 키워줘요?


나는 무언가 변명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가위눌린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여섯 번 정도 더 찾아와도 아기는 내 대답을 듣지 못했고, 그 후로는 더 오지 않았다. 나는 문쪽으로는 머리를 두지 않고 자게 되었다.


둥지에서 떨어진 참새를 보고 이제는 영원한 잠을 자고 있을 아기가 생각났다.


참새야, 너는 누구의 꿈에 들어갈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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