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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12. 2019

사실 나는 지혜가 아니다.

가오슝에서 열다섯 번째 일기


사실 내 이름은 '지혜'가 아니다. 이 페이지에는 '황지혜'라고 이름 석자 큼지막하게 박혀 있지만 그건 내가 지은 이름일 뿐, 실제 내 이름은 지혜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방 한 칸을 빌려 주인집과 같이 살면서, 고작 막내딸 이름 하나 짓겠다고 사장들만 간다는 작명소에 사십얼마를 지불한 우리 아버지께서는 별로 좋아할 소식은 아닐 거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지혜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지난여름,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마지막 여름에 나는 정말이지 진지하게 개명을 할까 고민했다.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켜켜이 쌓인 사연들이 이제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사연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비싼 작명소에서 지은 귀한 이름. 그러니 평생 우리 학교 이름, 내 반, 나의 친구들, 내 키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누구보다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다. 솔직히 그 어린 나이에는 가혹한 일이다. 당장 눈으로도 보고도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는 게 신기해 죽겠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붙은 이름에 깃든 사랑을 믿어야 한다니. 심지어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많이 가난하고, 아버지는 매일을 술에 찌들어 딸에게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터무니없는 일로 화를 내고, 무시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해야면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날 용기를 얻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 이름은 귀하고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짓기 위해 큰돈을 내고 심사숙고를 하여 작명소를 골랐기에 나는 어른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공식을 들입다 외워야 했다.


성장하면서도, 때때로 내 이름은 내 명예를 훔치고 무거운 짐을 지우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 잘 되거나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면 어머니는 종종 내 이름 덕이라고 했다. 그리곤 또 시작되는 역사.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짓기 위해 사장님들이 어쩌고 저쩌고 (이하 생략). 그러나 종종 내가 내 삶을 원망하거나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 용기를 잃으면 어머니는 같은 이유로 답답해했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짓기 위해 사장님들이 (이하 생략) 어쩌고 저쩌고. 그러니 괜히 쓸데없이 걱정하고 불안해한다고. 


심지어 내 친구들은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고 대부분 '황지'나 '황 씨'라고 불렀다. 그러니 사실상 시험지, 답안지, 주민등록증, 여권 등에 적혀 있을 때나 처음 보는 이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말고는 실직적으로 이름이 쓰일 일은 별로 없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이제 그 이름에 겪인 역사만 들으면 진절머리가 났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잘못을 하고 많은 이에게 말실수를 하고 상처를 줬다. 응석을 부리기도 했고, 합당하지 않은 일에 대뜸 화부터 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받을 수 없는 짓거리도 숫하게 했고 그런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친구도 많고 적도 많고. 그리고 그들 모두가 내 이름 석자와 내 행적을 알았다. 그 사실은 마치 무게추처럼 나를 끌어내렸다. 지난여름. 지나치게 더운 날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여기서 도망치고 싶단 생각만 했다. 다른 인간이 되고 싶다고,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빌었다.


그 당시에는 이제 내 이름마저 너무 싫었다. 틈만 나면 나를 한심하게 보는 사촌이 한심하고 무례하고, 재수 없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을 때 '너 진짜 지혜 같다.' '지혜처럼 구네, ' '지혜처럼 되려고 하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끔찍한 인간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저들끼리 웃곤 했는데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언어는 힘을 갖는다는데.  내가 정말 그렇게 비웃고 무시할 만한 인간의 대명사이면 어떡하지.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는 날에는 때로 게임의 전원을 끄는 것처럼 삶의 버튼을 아래로 내려버리고 싶었다. 


이름은 나를 대변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다. 그렇기에 사실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나 역시 내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했다. 인생이 불행한 나는 내 이름의 힘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다. 그러다 결국에는 조롱받아 마땅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더 최악인 점은 나 역시도 내 이름이 그렇게 욕으로 비웃음으로 쓰이는 데에 대한 변론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궁지에 몰린 나는 결국 절친한 이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나 개명을 하려고. 지혜라고. 그리고 졸업하면 전화번호도 바꿀 거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SNS 계정도 남들이 잘 모르는 거 하나만 남겨두고 다 없애버리고, 빨리 졸업하고 취직해 돈을 모아 부모님과도 떨어져 살고 싶어. 결국은 아무도 원래의 나를 몰랐으면 좋겠어.'


늘 내게 빛이 되어주던 선생님께 비밀스러운 고백을 하던 날, 아직도 밖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여름이었고 내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저녁이라 여기저기 거실에 불이 들어 있었다. 밖에는 산책하는 이들도 많았다. 세상에 행복과 평온과 제 몫을 잘하는 사람들이 저리 넘쳐나서, 내 자리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그는 자초지종을 듣고 묵묵히 듣다가. 의외로 수긍의 말을 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자기가 지은 이름으로 새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아니면 필명라도 네가 불리고 싶은 대로 불리는 것도 좋지. 작가들은 누구나 필명이 있잖아?'


그때부터 나는 언젠가 남들 앞에서 글을 쓰게 된다면, 꼭 지혜라는 이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혜라는 이름이 주는 어감이 좋았다. 지혜라는 이름은 의외로 흔한 듯 흔하지 않은데, 그들은 늘 지적인 안경을 쓰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말만 하였으며 주위에 좋은 친구를 두고 있었다. 지혜롭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혜라는 이름은 '지혜롭다'라는 표현으로도 쓰여 상대의 지적인 면을 칭찬할 때도 쓰인다는 사실 역시 마음에 들었다. 또 초성도 귀엾지 않은가 'ㅎㅈㅎ' 라니. 마치 웃는 사람 같다. 


대만에 온 이후로 한동안은 그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혜 말고도, 내게는 새 이름이 잔뜩 생겼기 때문이다. 영어 전용 수업이 많고, 중국어보다는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를 '루시'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원래 이름보다 '루시'가 좀 더 익숙해졌다. 반면 어학원 선생님은 나를 '쯔-훼이'라고 부르셨는데 그건 내 원래 이름과 확연히 달랐으므로 한동안은 이름에 대해서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이름에 대해서 자유로워진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사실상 내 인생의 모든 무게는 거기에 달려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홀가분했다. '루시'라는 이름도 좋았다. 사실 나는 전부터 '루시'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루시'는 사실 어린 시절 하던 온라인 게임 캐릭터에서 따온 이름인데, 어린 수녀 캐릭터인 '루시'는 갈색머리에 불안한 눈매를 한 안경잡이 여자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파란색을 좋아고 더위를 많이 타, 불보다는 물을 쓰는 캐릭터들을 주로 사랑하고 했다. 처음 '루시'를 좋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물을 이용한 공격을 한다는 점이 멋있어 좋았고, 또 일러스트가 귀여웠다. 

그러다 '루시'의 성장한 버전이 나왔는데, 그 순간 나는 루시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갈색머리지만 성장한 루시는 더 이상 불안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옷차림 대신 길고 짙은 치마를 입고, 이제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한 손에 꼭 쥔 책도 마법으로 띄우고 있는데 그 점까지 너무 멋있어 보였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한 탓에, 파티 플레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하루 종일 켜서 '루시'캐릭터만 구경하기도 했다. 사실 언젠가는 그런 자신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딘가 영어 이름을 쓰게 되면 꼭 '루시'를 써야지.


언젠가 인터넷을 하다가 전설적인 영국의 락 밴드, '프레디 머큐리'의 이름이 사실 본인이 지은 이름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도 어딘가 동질감이 들었다. 물론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지었는지야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자기 손으로 지은 이름에는 어떤 마력이 있다. 마치 내가 원하는 대로 이름을 지은 것처럼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고, 내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담게 된다. 때로는 새 삶을 부여받는 기분마저 들어, 망해버린 저번 삶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란 기대에 차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도망치는 건 물론 해답이 아니다. 어쩌면 이 긇을 읽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름을 바꾸면 뭐해?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쯤 도망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든다. 의외로 멀리서 보면 문제를 알 수 있다. 도망치고도 또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진정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비행기로 두 시간 반을 타고 와서, 전혀 다른 인간으로 사니 이제야 내가 바로 보였다. 이름에 의미부여를 너무 크게 한 것도 문제였지만, 결국 남이 지어준 이름을 갖고 산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이름은 남이 지어줄 수밖에 없지만, 단어에 뜻을 부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해서 남들이 준 의미대로 여겼다. 부모님이 부여한 의미대로, 사촌이 부여한 의미대로, 또 인간관계에 겁먹은 내가 부여한 두려움대로. 그렇기에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그 이름을 쓰고 살아야 할 나에게는 새로운 숙제가 생긴 셈이다. 이제 나는 이름에 스스로 뜻을 부여하고, 새로운 인생을 다짐해야 한다. 즉,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어쩌면 개명이 해법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작품에서는 원작자의 뜻이 곧 법이 아니던가. 내 인생의 원작자인 내가 또 내 이름 밑에 뜻을 비워둔다면, 또다시 남들이 붙여대는 뜻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시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내게 새 생명을 부여하리라. 그리고 새로 살아가리라. 그렇다면 내가 지은 수치스러운 언행과 사건들을 짊어지고서도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그럴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 그게 중요한 거니까.


끝으로, 내가 내 본명과 마주하기로 결심한 것과 달리 이 곳에서의 이름은 계속해서 '황지혜'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이름을 좋아하니까. 또 그만큼, 내가 쓴 글들도 지혜롭기를 바라니까. 당연히 내가 진짜 지혜는 아니지만, 아마도 조금쯤은 지혜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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