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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우 Sep 19. 2015

해적왕의 보물상자

수능 시험이 있는 날에는 몇 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게 된다. 한없이 성실하고 맹목적이고 치열했던 어린 나. 뭘 위해서냐는 물음에는 그저 훌륭한 사람 되려고, 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어디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었으므로. 


좀 더 넓혀 돌이켜보면 그때는 나같은 학생이 비정상은 아니었다. 꽤 많은 친구들이 대학이 제일이고 전공이나 적성은 차후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대학지상주의가 짙게 깔린 진학상담의 영향이었는지 '좋은 대학의 점수 낮은 과'를 써서 일단 붙고 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울고 싶다.

적어도 나는 참 멍청했다. 열심히 할 줄은 알았는데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될지는 고민도 할 줄 몰랐다. 도로를 능숙하게 운전해서 달리면서 정작 도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모르는 꼴이었다. 해가 지나면서 저절로 꿈이 생길 줄 알았다. 꿈은 내가 꾸는 것이지 사회가 꿔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대학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제도가 잘못되었느니 시스템의 문제라느니 하는 바깥 탓은 내게 별로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그저 어리고 씩씩했던 19살의 내가 안쓰럽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나같이 이유도 모른 채 타올라 소진하고 있는 친구들도.

수능과 대학은 내게 무슨 해적왕이 숨겨놓았다는 보물상자같이 가슴설렜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보물은 바로 네가 보내온 그 시간'이라는 쪽지만 있었다. 나의 항해는 보물상자에만 매달렸던 나머지 의미있는 경험들은 곁눈질로 스쳐지나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정답은 없다는 어떤 웹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모든 사람이 보물상자를 가질 수는 없지만, 자신이 걸어온 길이라는 보물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다. 제각기 달라도 보물은 모두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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